근자 언젠가부터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하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랐고, 또 누군가에게 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을 만큼 정말 절실히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기도 했다. 긴 이야기를 따라오며 누군가 읽을 만큼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자신은 더욱 없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을 오랫동안 뺏어 이야기해야만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내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새까만 우주처럼 숨 막히도록 눈부신 소설이라는 세계와, 나의 어떤 볼 품 없는 이야기도 감히 연결시켜서는 안 될 가장 확실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못지않게 끔찍한 것은 정말이지, 이제 막 글쓰기에 옹알이를 하고 있는 풋내기 라이터가 소설을 쓰겠다고 섣부른 패기를 부리는 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유치원 생일잔치에서 그 달의 생일자들이 예쁘게 자신의 허리에 손을 얹고 사뿐사뿐 행진할 때처럼, 부끄러워 그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은 청중의 시선이 즐겁고 사람들의 사랑에 목말라 있는, 그런 어리고 설익은 글쓰기의 동기를 들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알고 보면 놀랄 만큼 부끄러운 나의 독서 커리어였다. 그것은 글쓰기에 있어 나를 근원적으로 자신 없게 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책을 좋아하지만 난 collector에 속할 뿐 reader는 아니었다. 그래서, 도대체 나는 얼마나 책을 안 읽었는가.
스무 살 때 친한 여자애가 들국화였던가, 어떤 꽃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상하 권으로 빌려준 적이 있었지만 스무 살보다 오랜 시간을 더 산 지금까지도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읽지 않았기에 돌려주지도 않았다. 그 친구의 순수하고 고마웠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읽어야 되겠다고 줄곧 생각해왔지만 많은 책들 사이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 그 책을 언제 찾을지, 언제 읽을지, 과연 읽을 수는 있을지, 그 어머어마한 일들에 관해 나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어렸을 적에는 금성 출판사의 추리소설 전집을 좀 봤었다. 하필 왜 세계 문학 전집도, 한국 문학 전집도 아닌 추리소설 전집이 우리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고른 것은 아니었다는 것뿐. 어머니의 친구분이 금성 출판사에서 일하셨었고, 어느 날인가 안경을 쓰고 마르신 그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던 날 이후 언젠가부터 수십 권의 추리소설 전집이 세로로 긴 유리문이 있는 연갈색의 책장에 꽂혀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
그 책들은 원색적인 컬러 그림 표지 하드커버 안에 시종일관 경직된 번역과 투박한 서체를 품고 있었다. 그처럼 건조한 특색은 오히려 추리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상상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 전집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매우 명석하고, 논리적이고, 동시에 위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 왔다. 그러나 그 꿈은 실패한 듯하고, 덕분에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독특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이한 점은, 무엇인가 이해나 공감이 되지 않을 때는 매우 집착적이고 강박적이고, 오랫동안 한 가지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소름 끼칠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하는데, 그 추리소설 전집의 영향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어쨌든 금성 출판사 전집 중 나름대로 여러 단편들을 야금야금 진지하게 보며 즐겼던 기억이 있다. 코난 도일의 작품에 나오는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 콤비의 이야기를 비롯해,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명작 추리소설을 방바닥에 배를 깔고, 인상을 쓰며 치열하게 읽곤 했다.
그러나 나의 독서 히스토리는, 놀랍게도 그 금성 출판사 전집에서 멈춰버린다. 이후의 삶은 축구와 농구와 탁구와 배구, 헌팅과 술자리와 여행, 짝사랑하고 짝사랑받는 치정의 역사로 뒤범벅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중학교 때 미용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무심한 듯, 심장을 쿵쾅거리며 여성 시대와 같은 여성 잡지를 들쳐보거나, 그것보다 훨씬 더 심장을 쿵쾅거리며 친구와 함께 친구네 형 서랍에 봉인되어 있던 남성 잡지를 보기는 했지만, 그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청춘의 욕망을 읽는 일이었다.
사실 당시의 나는 아직 정신적으로 너무나 미숙해서 여성 잡지도, 남성 잡지도, 제대로 된 책도 감당할 수 없었다. 드래곤 볼과 슬램 덩크를 제외하고 그 무렵 유일하게 재미를 느끼며 읽은 책은 중학교 영어 교과서였다. 아름다우셨던 학원 여자 선생님이 너무 정성껏 잘 가르쳐주어서 한 줄 한 줄 재밌게 공부하며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제인과 브라이언의 공항 대화나 날씨 뉴스 같은 것이었지만 전혀 다른 언어로 된 책을 스스로 읽어나가는 달지근한 맛을 처음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수업 시간이나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어둠의 영웅 논픽션(조직 폭력배 두목의 이야기와 대도 누구누구라는 제목의 책)과 역사 소설(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을 보기도 했다. 그 책들은 암흑의 고등학교 생활 중에도 흔들리는 작은 촛불이 되어 주었다. 그건 진공 상태에서 책 자체가 가진 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귀신의 집 데이트 효과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서 남들 다 공부할 때 몰래 본다는 상황 자체가 재밌고 즐거웠다. 그러나 선생님 몰래 책상 밑에 놓고 보거나, 문제집 사이에 끼워놓고 보는 스릴도, 친구들의 경건한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오묘한 승리감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그 초조했던 청춘의 시간들이 그립기도 하고, 묘하게도 그 시절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지금까지도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그 외에는 그림책 몇 권 정도를 보았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나, 올가 토카르추크의 ‘잃어버린 영혼’처럼 짧은 그림책들은 몇 권 정도 ‘완독’을 했다. 잃어버린 영혼은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기도 하고, 나를 빼고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 좋겠기도 한 책이다. 생각하도록 만드는 그림책을 볼 때면 책에서 오래 시선을 떼지 못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최근에는 고문영의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을 인상 깊게 봤다. 다 보는데 30초면 충분한 책이다.
그밖에 신앙서적이나 신학 책을 좀 훑어봤다. Not a fan이라는 책은 밑줄을 그으며 완독 했다. 선교 훈련에서 필독서여서 강박적으로 성실히 읽기도 했고, 같이 가게 된 자매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한 스푼 있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의 ‘안식’은 짧지만 아름다운 신학적 문장들이 뚱뚱한 사라다 빵처럼 꾹꾹 눌러져 있는 책이다. 10년 전쯤부터 제일 좋아하고, 제일 아껴 읽고 싶은 책으로 첫 번째로 떠오르는 책인데, 그 책도 아직 다 읽지 않았다. 그 책의 크기와 두께를 알게 되면 누구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얼마나 진지하지 않은지 의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독을 떠나 인상 깊었던 책들이 좀 있다. 중3 말미에 가방에 넣고 다니던 홍정욱의 ‘7막 7장’은 정말 아껴서 재밌게 읽었고, 30대에 펼쳐 보게 된 석지영의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는 그 정도에는 못 미쳤지만 역시 저자가 가진 삶에 대한 진지함과 열정을 인상 깊게 보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20대 무렵 언제였나, 불과 몇 페이지나 수십 페이지 정도 읽었던 것 같은데, 서사도 가슴을 저미게 했지만, 그중 몇 문장들에 영혼의 이마를 날카롭게 베인 느낌이었다. 내 삶에는 지금도 죽은 시인의 사회의 이야기가 허파처럼 숨 쉬고 있다.
물론 그밖에 학교 독서 리포트용 책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 권도 기억나지 않는다. 읽은 척하고 지어서 써냈거나, 읽다 말고 써냈거나, 읽었지만 써낸 즉시 망각했다. 나는 얼마나 개인의 영달에 밝고 실용적인 인간인가. 생활에도 전공에도 도움되지 않는 소설 장르에 나의 인생을 낭비할 생각은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길고 긴 준비 운동이 될지 모를
책을 얼마나 안 읽었는지를 이렇게 길게 썼지만, 봤지만 미처 간과한 책들까지 더해서, 내가 평생 봤던 책들을 다 펼쳐놓고 보면 정말 웬만한 유치원생에게도 안 뒤지는 단출한 독서 아카이브다. 파일로 만들면 0.1kb도 안 될 것이다. 이 정도가 다다. 내가 기억하는 한. 맹세코 이 외에, 어떤 소설도 완독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사실은 일반 문학 소설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해도 잘못된 말이 아니다.
주변인들은 엠티나 선교 여행 같은 것을 갔을 때 내가 틈틈이 책을 보던 모습이나(사실은 집에 오는 즉시 먼지 덮인 책들 사이에 대충 꽂아 놓고 다시는 펼쳐 보지 않는다), 신중한 말투나, 지적인 목젖 같은 것만 보고 으레 책을 많이 읽을 것이라고 단정하고는 하는데 사실 나는 우표 수집가나 레고 수집가처럼 책 수집가일 뿐이다. 물론 언젠가 읽을 생각으로 기어코 구해 책장에 꽂아놓곤 하지만, 그러고는 약속 많은 사춘기 소녀처럼 잊는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지적인 방향성을 갖고 있고, 또 컨디션이 좋은 날 말과 글이 그럴듯하게 될 때가 있지만, 운이 좋은 것일 뿐이다. 나는 애독가가 아니라 애서가, 그러니까 물리적인 책 애호가다. 말하고 나니 시원하다. 이런 게 바로 글쓰기의 통쾌함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럼에도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한 권 읽지 않은 사람이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이 소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기에 현실에도 없는, 더 극단적인 여성성을 흠모하게 되는 것처럼, 소설을 안 읽은 사람은 소설의 소설성을 훨씬 더 이상적으로 꿈꿀 수 있다.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 동안 상상 속에서 소설을 충분히 꿈꾸며 짝사랑했다. 아마 읽다 보면 실망도 많이 하겠지만, 실망까지 달콤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소설에 대해 귀 막고 코 막고 자폐적으로 살아오며 꿈만 꾸었던 세월 덕분이다. 또 특별히 감사해야 할 대상이 있으니. 다름 아닌 신학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 서적과 신학 책들의 저자들이다.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신앙, 신학 서적을 편찬 출간해준 많은 신앙 선배 저자들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소설에 대한 기대감이 더 이상 이를 수 없을 만큼 차오를 수 있었다. 배가 고플 만큼 고팠다. 맨 밥에 물을 말아 먹어도 꿀맛일 것이다. 어떤 소설책을 읽어도 몇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설레서 기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글을 정말 잘 못 쓴다. 소설에 관한 재능도 없다. 그와 관련한 경험도 없고.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더욱이 이즈음 예민증, 불안증, 강박증, 우울증 등 다양한 심리 증상을 앓고 있어 무엇을 해도 맥 없는 추동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런 낙서 따위로는 읽을 만한 단편 소설 하나 탄생할 리 없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아무 계약도, 성실함도, 절실한 이유도, 미래의 약속도 없이, 그냥, 그냥 막 쓰는 것이다.
그냥이 무섭다고 하지만 나의 그냥은 안 무섭다. 나의 그냥은 정말 그냥 그냥이다. 그리고 무서워지고 무서워하고 그런 세계들이 참 싫다. 무섭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그러한 세계는 이제 좀 떠나고 싶다. 간절히, 간절히. 어쩌면 나는 글쓰기나 독서에 간절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에 간절한 것이다. 숨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읽히지도 않을 글을 쓰고 읽지도 않는 책을 사고 급기야 쓰지도 않을 소설에까지 마수를 뻗치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글이 숨통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나불거리고 얼마든지 거짓말쟁이가 되며, 그 속에 숨고 싶다. 신비롭고 안락한 거짓의 세계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