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캐리어.

우걱우걱, 핏빛 마카롱과 함께.

by jungsin

밤 11시 20분경. 창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난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의 책 출간하기 프로젝트 신청 마감을 40분 남겨두고 있었고, (그 신청서를 쓰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브런치 작가 신청 1단계 과정인 삼백 자 자기소개를 쓰고 나서, 2단계 과정인 삼백 자 글쓰기 계획서 작성을 거의 마쳤고, 친구에게 11시 30분 안에 전화를 해주기로 약속했고, 다음날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7시 반까지 인천공항에 가기로 되어있었고, 환전을 해놓긴커녕 환전에 필요한 현금조차 없어 집에서 7~8분 정도 거리의 ATM 기계에 가서 약간의 현금이라도 미리 뽑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염없이 하고 있었고, 밤새 짐을 싸고 밀린 숙제들을 하기 위해 커피빈에라도 가서 케이크 한 조각을 사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내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다. 누군가 팡, 하고 터트려주기를 기다리며. 문제는 그 일들이 터져나가기 전에, 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난 며칠 전부터 어떤 새롭게 힘든 일이 생겨서(언제나 우리 삶에 힘든 일은 새로운 것이지만) 술 취한 사람처럼 휘적거리며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태옆이 다 풀려버린 태옆인형처럼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며 어떤 일도 힘 있게 하지 못하고, 다만 어떻게 하면 마음에 힘이 생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이런 시도, 저런 시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시도에는 내가 아는 최선인 무릎 꿇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기, 말씀 읽기, 설교 듣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오래 진지하게 집중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다만 어젯밤 친한 동생과 나눈 두 시간 정도의 통화만이 의외로 퍽 큰 위로가 되었다. 그 친구도 큰 범위에서 나와 비슷한 느낌을 느끼며 하루하루 버텨나가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을 느꼈는데,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게 일정한 만큼의 위로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에는 나와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이토록 절실한 내적 씨름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통적 과제 같은 것이라고 느껴지자 해석하고 풀어보고 싶은 의욕이 생기며 어느 정도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자고 일어났다. 밖은 어두컴컴했다. 어슴프레 축축한 빗소리가 들렸다. 늦가을 추위도 느껴졌다. 이 모든 것들이 화음을 이루며, 무질서하고 음산한 생각들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다시 그렇게 되었다. 하루 종일 무력하고 우울한 시간들. 새문안교회 설교자의 안식에 관한 인상적인 설교를 들었지만 큰 힘이 되지는 않았다. 큰 고민이 없는 평소 같았으면 내가 관심 있던 주제에 관한 신학적 포인트들을 탁월하게 짚어나간 그 설교에 한껏 고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후에 부스스 일어나 송장처럼 누워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들었던 그 설교는 남의 이야기 같았다.



다시 밤 11시 20분경의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난 지독한 무력감에 ATM 기계까지 걸어갈 에너지도, 글쓰기 플랫폼 작가 신청의 3단계까지 밀고 나갈 의욕도, 캐리어를 싸거나, 커피빈에 가서 밤새 고생하는 동안 보충할 스위트 간식을 사 오거나, 10분 안에 전화를 걸기로 한 약속을 지킬 힘이 없었다. 아주 사소한 일도 버거웠다. 나의 불안과 무력감은 평소에 갖고 있던 나의 모든 생기와 열정, 그러니까 가령 오늘 소개팅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설렘과 기대의 감정 같은 것들을 일제히 상쇄시키고 있었다.



밖에는 더욱이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폭풍우보다 더 무겁고, 스산하고, 암담하게 느껴지는, 온 세상의 무게처럼 암담한 비였다. 빗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창밖에 무의미한 시선을 두고서 생각했다. ‘그냥 집에 있고 싶다. 내일 아침 공항에 가고 싶지 않다. 아니 캐리어도 싸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렴풋이, ‘그냥 프랑스 영화나 영국 영화나 며칠 동안 틀어박혀 보고 싶다, 보다 말고 미뤄둔 뉴스룸 같은 미드 시리즈를 연속 재생하기로 틀어놓고 입 헤 벌리고 한두 달 동안 케이크와 짜장면만 먹고 싶다.’는 충동도 스쳐지나갔던 것 같다.



이 현실의 배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저 멀리 어두운 바다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마녀의 노랫소리와 같은 생각에 홀려 첨벙첨벙, 음침하고도 아늑한 유혹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어쩌면 난 정말 그 치명적인 사이렌 마녀의 노랫소리에 홀려버렸을지 모르겠다. 비만 안 왔으면. 그 빗소리를 잠시 멍하게 듣고 있지만 않았다면.



빗소리를 듣다가,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오기가 생겼다. ‘저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리고 싶다.’ 오히려 힘차게 내리는 비가 촉매제가 되었다. 퍽, 하고 마음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맨 이마로 바위에 부딪혀 보고 싶었다. 맨 이마로 바위에 부딪히며 입술 위로 내리는 핏물을 맛보고 싶었다. 비를 맞으며 ATM기에 뛰어가서 돈도 찾고, 가을 빗소리 들으며 전화로 신나는 소개팅 이야기도 만끽하며 나누고, 커피빈에 가서 달적지근한 케이크 한조각도 사 오고, 안테나 뮤직 워리어스의 뜨거운 안녕을 들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짐도 싸고, 글쓰기 플랫폼 글 발행 권한 신청도 하고, 시간이 남으면 밀린 숙제들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청서를 쓰던 노트북을 닫고 귀신이라도 씌운듯 방에서 걸어나가 무지개떡 무늬의 하얀 면양말을 신은 채, 그대로 샌들을 신었다. 우산을 펴 들고 빗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더 영화적인 연출을 위해 우산도 안 폈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 못했다. ATM 기계를 향해 뛰어갔다. 바닥이 다 닳은 크록스 갈색 샌들을 신고 매끈한 보도블록에서 몇 번이나 미끄덩거리는 위험천만한 장면을 연출하며 뛰었지만, 마음이 그렇게 신선하고 상쾌할 수 없었다. 25분쯤 친구에게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11시 30분 ATM 부스에 도착해 전화를 잠시 끊었다. 부스 안은 비상벨 소리와 함께 우렁차고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빨리 안 나가면 내일 아침까지 갇힐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경고멘트였다. ‘아 그럼 나 내일 아침에 일본 안 가도 되네?’ 하는 사이렌 마녀의 뱃노래 소리가 잠깐 들렸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문이 잠기지 않도록 우산을 문 사이에 걸어두고는, 은행강도처럼 황급히 돈을 뽑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렸다.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와의 대화는 어김없이 심오하고 깊은 차원, 그러니까 대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소개팅 안의 미시적인 감정들에 관한 이야기로 치달아갔다. 그 무렵 내 발걸음이 집을 향해 꽤 많이 와있음을 깨닫고 망설였다. 이대로 집에 갈까, 커피빈에 갈까. 다시 방향을 바꿔 커피빈을 갔다 오려면 비를 맞으며 거의 30분 정도를 돌아 다녀와야 한다.




다시 오기가 생겼다. 이건 무슨 오기인가. 추적추적. 나는 커피빈을 향해 걸어갔다. 하얀 무지개떡 양말이 완전히 젖어버렸다. 양말을 벗어서 에코백 안에 쑤셔 넣고는 맨발로 더욱 힘차게 걸어갔다. 커피빈에 도착해, 잠시 의자에 앉아서 통화를 했다. 12시에 문을 닫는다. 내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꾸 대화의 흐름을 끊었던 터라 친구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하기가 미안해 또 망설여졌다. '왔으니(비와 우울감을 부숴버린 성취감은 있었으니) 케이크는 사지 않고 돌아갈까?'. 거의 매 순간 마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내 삶에서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들어온, 익숙한 노랫소리였다. 11시 59분.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계산대 앞에 다가섰다. 케이크 코너를 흘깃 보고는 바닐라 마카롱을 하나 달라고 했다. 평소에 보며 먹고 싶었지만, 너무 작고 비싸서 군침만 삼키던 그 바닐라 마카롱. 왠지 내 것이 아닌 것도 같고, 보기는 보되 사먹지는 않아야 할 것만 같았던 바닐라 마카롱.




바로 금방, 새벽 1시경. 그러니까 이 글을 쓰기 시작하기 직전, 난 푹신푹신한 바닐라 마카롱을 ‘우걱우걱’ 먹어버렸다. 조금 전에 배달 온, 가을 빗방울을 머금은 신선한 500ml 건국우유와 함께. 30초 정도가 걸렸다. 3천 원짜리 마카롱을 먹는데. 원래의 나라면 아끼고 아껴 천천히 먹었겠지만 이번 마카롱은 이렇게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의욕적으로’와 ‘신경질적으로’ 사이 어느 지점이었다. 분명히 바닐라 색이었지만 마음의 눈에는 핏빛이 얼핏 지나갔다. 슬픔과 통한의 바닐라 마카롱이었다. 이제 짐을 싸야겠다. 뜨거운 안녕을 들으며. 뜨겁게 뜨겁게 캐리어.



찬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여 -

달빛 아래 타오르던 붉은 입술 -

이 순간이여 영원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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