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민의 연주에는 김광민이 묻어있다.
지난해 여름이었다. 그날 밤, 한강변 하늘은 비구름을 잔뜩 머금은 기압이 뒤엉키고 있었다. 지인들과 함께 재잘거리며 먹으려고 아스팔트 계단 위에 올려놓았던 치토스 봉지가 자꾸만 날아가려 해서 치토스 봉지 끝에 무언가를 올려놓아야 했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나는 힘든 일을 계기로 너무나 시야가 좁아져있었고, 이상과 낭만 같은 것은 이제 최대한 마음에서 닦아내버려야겠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최대한 빨리 헤치워버리자는 둥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정신없이 몇 달이 지나가고, 사람들과 그렇게 한담을 나누는 것조차 오랜만이었던, 그런 때였다.
오랜만에 누구라도 만나 수다를 떨 수 있던 그 시간이 무척 소중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편안한 사람들과 한껏 자아중심적인 수다를 흥청망청 떨고 있었다. 먹구름과 태풍이 예사롭지 않더니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남은 치토스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그렇게, 거센 비바람을 헤치며 산만한 걸음으로 경사진 한강변 뭍으로 돌아 올라오는 길. 결혼을 앞두고 있던 자매가 45도 각도 뒤통수 뒤로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결혼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그런 태도로) 만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관계의 자연스러운 익어감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들어본 조언들과 다른 형태의 말이어서 잠시 머릿속에서 버퍼링이 일었다. 보통은 연애만 하고 싶은 건 아니냐,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 배우자 기도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등의 말을 들어왔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려면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갖고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말 같아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산만하고 가벼운 분위기였기에 말 뜻을 다시 묻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될 수 있었지만 대화의 흐름을 거스르는 되물음 끝에 곧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인즉 이런 것 같았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중심으로 실타래를 풀어가봐라. 여자를 대할 때 천천히 익어가는 방향성을 갖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게 좋겠다.’ 그간의 힘들었던 경험과 그로 인해 반사되고 투영된 의욕들에 관해 어떻게든 즐겁고 가벼워보이도록 말한다고 말했는데, 아마 그런 내가 경직되어보였나 보다.
오히려, 난 원래 자연스러움에 관한 한, 누구에게 조언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그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제라면 그 반대의 영역이 문제였다. 나는 편안히 사람을 마주하며 무언가를 나누는 것을 즐기려고, 무엇을 느끼려고, 어떤 진정성에 도달하려고만 드는 사람이었다. 한없이 부들부들하고 낭만적인 낭인이었다. 그러다가 특별한 상황에 쫓기게 되며 가치의 균형이 무너져있는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실재와 실존과 존재에 시선을 두는 사이 실제와 관계와 행함은 싱크홀처럼 무너져 있었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횡해져 있는 현실을 정신없이 채워가야만 할 것 같았다. 마지막 자부심 같은 것이 되어주었던 내면의 풍성함이란 가치가 문득문득, 퉁퉁 붓고 둔한 곰인형처럼 느껴졌다. 부욱, 실밥을 신경질적으로 튿어버리고 솜털을 다 뽑아 날려버리고 싶었다. 출발 케이지 뒤에서 눈가리개를 한 채 씩씩거리며 발길질을 하고 있는 경주마가 된 것 같았다. 만일 어떤 계기가 되는 출발 화약소리 같은 것만 들렸다면 분노의 스프린트를 선보일 것이었다.
당연히 그녀로서는 지나가듯 가볍게 한 말이었을테고, 나의 어느 면에서 무엇을 느끼고 한 말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나도 참. 가볍게 들었으면 될 것을, 못내 그 문장이 왜인지 마음에 남아 메아리쳐 울렸다. 원래 의미가 무슨 뜻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아이디어와 비슷한 나 자신의 문제들에 관해 늘 호기심을 갖고 있던 탓이었다. 정서적 안정감이 부족하고 결핍이 많은 집강아지 앞에 던져진,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나는 개껌처럼 느껴졌다. 두 앞발로 꼭 움켜쥐고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물어뜯어보았다.
다행히도 비슷한 류의 주제에 관해 고민해오던 중이었고, 그런 문제들을 이해하는 일에 기민한 감각을 가진 나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어렵지 않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더욱이 마침 그와 비슷한, 한 스님의 조언을 연애못인 한 친구와 나누며 묵상한 적이 있던 터였던 것이다(스님의 말을 그리스도교인이 묵상한다니 좀 그렇긴 하지만).
“사귀려고 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여성만 만나면 바들바들 떨려서 말을 잘 못 하겠다는 모태솔로 남성의 고민 사연에 관해 법륜 스님이 했던 조언이었다. 사귀려는 어떤 부자연스러운(그 부자연스러움이 순박한 남자 아무개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사심과 탐심을 버리고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란 것이다. 연인이 아닌 친구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가다보면 오히려 여성이 그에게 어떤 매력을 느끼게 되는, 어떤 특이점에, 어떤 예측불가적 모먼트에 닿을 수 있다는 솔깃한 이론이었다. 그 연애못 친구와 둘이 한강변에서 나란히 앉아 그 이야기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깊이 나누며 복기했다.
김광민의 피아노 연주가 그렇다.
사실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성숙하고 아름다운 어떤 경지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김광민의 피아노 연주가 그렇다. 소박하게, 온 마음의 힘을 빼고, 다만 담백한 진심을 담아 꼭꼭 눌러 타건하는 것처럼 들리는 그의 연주에는 다른 피아니스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감동이 있다. 연주 전체의 분위기와 그의 표정, 호흡, 몸짓에서 느껴지는 주된 감상은 체념이다. 전반적으로 어떤 사무치는 아름다움이 흐르는 한편 억지스러움은 전혀 묻어있지 않다.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그러니까 그의 연주에서는, 어떤 여인을 꼭 붙잡고 싶어서 안달복달 애걸복걸하는 20대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아니라, 아름다운 한 여인을 사랑해본 것으로, 혼자 구체적인 어느 한 여인으로 인해 마음 속으로 사랑의 지경에 깊숙히 닿아봤다는 사실로써도 이미 충분했다고 느끼는 듯한, 어떤 독특하고 편안한 체념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떻게 말하면 좀 더 좋은 묘사가 될까. 고즈넉한 춘천MBC 앞 강가의 잔물결 같은 고요한 공명이 있다고 할까. 고독한 연주자의 슬픔과 아픔, 감사, 아련함, 힘 빼고 그리는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다고 할까.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그의 연주에는 그가 묻어있다. 단조롭고 너무 쉽게 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마저 하는 연주에서 그토록 풍부한 느낌들이 정갈하고도 눅눅하게 베어나온다는 사실이 불가해하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정말이지 이 표현이 가장 알맞다. 김광민의 연주에는, 김광민이 묻어있다.
근래에 어느 기도원에서 일을 하게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현실의 끝까지 갈 각오가 되어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현수막에서 한달 내 꽉차있는 성회의 강사 라인업을 보며 발길을 돌렸다. 직관이 너무 발달한 난, 사진을 보고도 무슨 설교를 할지 알 수 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으로 하루 동안 끙끙 앓다가 뒤늦은 반려 의사를 전했다. 무척 실례가 될 수 있는 상황이어서 용기가 필요했다.정말 현실이 너무나 뒤엉켜가고 있었다. 그러한 중에 미끈거리는 깨달음이 왔다. ‘사귀려고 하지마. 잘 되려고 하지마. 자연스러워도 괜찮아. 너여도 괜찮아.’ 법륜 스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만 같았다. 사람의 말이었다면 비법처럼 느껴졌을텐데. 그런 정도의 울림통이 아니었다.
나의 한계 바깥에 있는 어떤 불편한 자리로, 그렇게 나를 내몰아야만 어떤 모종의 응답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창세기 내러티브처럼, 눈물을 삼키며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필요하지 않을까. 야고보서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처럼 행위로 내 믿음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뒷목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승모근에서 발등 근육까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그것이 어떤 정직한 신학의 길 같았다. 그러나 이제 난 이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각도로 정직해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나 자신이 되어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그처럼 넓은 시작을 경험하고 있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만일 그 모든 일들이 아무래도 괜찮다면,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훈련과 시험들이 모두 아무래도 괜찮다면, 내가 어떤 틀에 꾸겨넣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면, 이렇게 해도 괜찮고 저렇게 해도 괜찮다면,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욱 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더욱 넓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자리와 내 자리가 모두 더 넓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꼈던 대로, 혹은 사람들이 내게 말했던 대로 나를 둘러싼 일들이 어떤 시험이라면, 그건 A 또는 B, 순명 혹은 항명이라는 단선적인 진심이나 순발력의 시험이 아니라, 보다 그윽하고 깊은 차원의 시험이었을지도, 그런 일체의 뜨끈함을 이해해가는 시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