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바람처럼 시원하게.
번데기 껍질
일어나기가 그렇게 싫었더랬다. 몇 번의 알람이 울리고.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일어나는 것. 일어나 하루치 삶을 사는 것. 일어나서 지하철을 타고 또 타고 또 뛰어가 해야 할 일들. 그 일체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으로 끌려 나가고.
한 시간 반 동안 강사는 반복적으로 어떤 궤적을 그리며 정말 열심히도 움직였다. 그는 할 말이 많았다. 자신의 콘텐츠가 풍부했다. 열정적이고 뜨거웠다. 청중 모두가 궁금해할 만한 주옥같은 이야기를 유창하게 했다. 국제 정세와 경제와 외교 정보까지 거침없이, 쉼 없이 말했다.
카메라로 따라가고 또 따라가며 실수할까 노심초사. 쉼 없이 강사를, 강사의 풍성한 아이디어를,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쫓아다니고 나니 나는 텅 비어 있었다.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다 녹아 없어졌다. 번데기 껍질처럼 비어 버렸다.
그는 많이 배웠다. 열심히 자기의 공부를 하고 자기의 콘텐츠를 채워 담고 있었다. 초대받았다. 귀한 몸이었다. 마이크가 주어졌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쏟아냈다. 나는 카메라로 그를 쉼 없이 따라다녔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되었다. 그는 작은 실수쯤 해도 괜찮았다. 그저 그의 전문성과 창의성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있었다. 나에게는 인내와 성실함, 그리고 지루함을 참는 능력과 체력이 요구되었다.
쉬는 시간에 들어와 청소를 하시는 아주머니들이 계셨다. 강의가 끝나면 손걸레와 분무기를 들고 들어오셔서 마스크를 쓴 채 입을 굳게 마물고 바이러스 살균 청소를 하셨다. 이토록 깨끗한데 또 청소를 하다니. 정말 날파리 한 마리 살지 못하겠군. 도무지 휴머니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다. 흩으러짐과 못됨과 헛점과 불안함과 익살스러움과 사랑과 눈물 같은 것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녀들도 나와 비슷한 재능을 요구받고 계신 것 같았다. 강사와 청중이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청소를 해주시는 아주머니 두 분과 나 밖에 없었다. 슥삭슥삭 칙칙. 슥삭슥삭 칙칙. 너무나 적막하고 삭막한 풍경이었다. 이적의 쉼표를 크게 틀었다. 직원이든 누구든 뭐라고 하든 말든. 아주머니들 좀 들으시라고. 음악이라도 좀 들으시라고. 우리 잠시 쉼표 좀 갖자고.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잎새가 떨어지는 걸 눈여겨본 적은 언제였죠.
기도해야 하는데.
나는 사소한 것이 고민이 되어 한 시간 반 내내 몇 번이고 계속 기도를 하려 했다. 하지만 촬영을 하며 기도까지 할 순 없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한다.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해야 하는데. 잊어야 하는데, 잊어야 하는데.
가슴팍까지 내려가지 못하는 얕고 가는 숨을 쉬며, 멍하니 뷰 파인더로 강사만 쫓아다녔다. 실수할까 두려워하며 기민하게 강사를 따라다녔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강사의 몸과 나의 시신경이 연동되어 하나가 된 후로 난 거의 실수하지 않게 되었다.
오후부터 밤까지 그렇게 넋이 다 빠지도록 일을 하고 나니 나는 없다. 9시 10분. 가장 가까운 서점을 가도 9시 50분이 넘을 것 같은데. 10분도 채 못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래도.
서점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내려서 내달렸다. 내가 되는 것이 중요했다. 나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발목이 아팠지만 아프지 않았다.
1000가지 감정이라는 책과 모든 것이 되는 법이라는 책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어 샀다. 첫 번째 책은 독일의 한 작가가 글이 안 써질 때 1000가지 감정을 생각해내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일일이 자신의 언어로 정의한 단어집이었다. 두 번째 책은 다양한 방면에 뜨거운 관심이 있지만, 꾸준히 하지 못하고 어느 한 가지 일도 끝마치지 못하거나, 겨우 흐지부지하게 흐리며 맺는 사람들에 관한 책이었다.
두 권만큼 허기가 채워졌다. 두 권만큼 든든했다.
뛰지 말자
버스가 1분 후면 도착한다. 부지런히 뛰었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들은 숄더백이 자꾸만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얼마 전 이렇게 허둥지둥 뛰다가 발을 잘 못 디뎌 다친 인대가 아파왔다.
하.... 뛰지 말자. 뛰지 말자 아무개야. 뛰지 마. 뛰지 말라고! 안 뛰어도 돼. 제발 안 뛰어도 돼. 괜찮아.
걸었다. 버스를 보내고 걸었다. 다른 버스가 왔다. 그냥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 버스죠 아저씨. 우는 손님은 처음인가요.
앉았다. 버스가 한강을 건넌다. 창문을 열었다. 강 야경이다. 강바람이 시원하다. 귀에 잘 맞지 않는 중소기업 브랜드 이어폰에서 Bruno Major의 Regent’s Park가 흘러나왔다.
I must have sent four hundred poems on the way you used to smile at me.
달콤하다. 참, 단 바람이다. 오늘 하루 중 가장, 아니 유일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블론드 아메리카노니. 과학 강의니. 경제 강의니. 다 필요 없었다. 다 죽어있었는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순간이어서 유일하게 행복했다.
그래. 이렇게 살자. 뛰지 말자. 뛰지 않아도 돼. 아니 절대로 뛰면 안 돼. 강바람처럼 강바람처럼 천천히 천천히. 슬로우 슬로우 캄 캄. 슬로우 슬로우 영혼 영혼. 슬로우 슬로우 나 나. 슬로울리 슬로울리 괜찮아 괜찮아.
비가 온다. 마시면 안 되는 맥주를 살까 말까. 에라 모르겠다. 슬로우 슬로우 맥주 맥주. 모두 잊고 푹 자야지. 다시 꿈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