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단상

by jungsin





글을 쓸 때 어떤 생각의 덩어리나 느낌을 핥아먹고 있다고 느끼곤 한다. 글쓰기는 지우고 고치는 일이 자유롭다. 언제든지 처음에 쓴 글을 열어서,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퍼먹듯 마지막 한 단어까지 구석구석 핥아먹을 수 있다.


글은 수정을 거치면서 얼마든지 변모할 수 있다. 고유한 맛을 잃거나 중요한 의미를 누락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이렇게 저렇게 맛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애초 싱싱한 재료를 기록하는 일에 충실했다면.


그 모든 일들을 위해서는 우선 붙들어야 한다. 싱싱한 글쓰기 재료를 부지런히 담는 것이다. 붙들려는 것의 몸집이 무겁거나 클 때는 붙들어두기 바쁘다. 다듬고 고칠 여력이 없다. 우선 그저 아무렇게나 붙든다. 그럴 때면 정신없이 써대고 대충 그냥 저장해버린다. 때로는 저장을 안 한다. 때로는 저장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안 되어 있다. 붙드는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몇 페이지를 훌쩍 넘는 글을 쓰고는 흐지부지 버려둘 때도 있다. 다시 보기도 싫을 정도로 질리기도 한다.


핥아먹기라는 표현은 붙들 때도 다듬을 때도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생각나는 대로 붙들어 건져 올리는 것이 핥아먹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려 다시 돌아가 읽고 또 읽으며 새로운 단어를 떠올리거나, 공들여 쓴 문단을 통째로 지우거나, 주어를 넣을지 안 넣을지, 조사를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와 같은 사소한 일들에 수십 분째 집착하고 있는 일 모두가 핥아먹기일 수 있다. 그렇게 요플레 뚜껑을 핥아먹듯 글을 쓰곤 한다.


흔히 사람들은 일단 쓰기 시작했으면 어떻게든 끝까지 써서 글을 완성하라고 말하곤 한다. 난 그런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끝까지 완성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언가 절대로 꼭 어떠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투는 사실 좀 유치하다. 본질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채 빈곤한 법칙만 강조한다면 어떤 분야든 그런 식의 일장연설, 들을 필요도 없다. 웅변의 시대는 지났다. 법칙과 당위를 명확히 하고 힘주어 주장하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껍데기 뿐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느 시대에는 옳았던 가치가 다시 어느 시대에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 법칙과 성취, 훈련을 강조하는 글쓰기 방법론이 그렇다.


완성되든 완성이 되지 않든 글을 쓰며 깊이 생각하고 느끼고 머리를 쥐어짜는 그 모든 일들, 그러니까 글쓰기의 본질적 질감의 상태로 들어가는 일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이다. 그러한 과정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자기 책 한 권을 갖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내 책 한 권을 출판하려고 첨벙거리고 버둥거리며 애쓸 것이고, 글이라는 넓은 바다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유유히 그 바다에 미끄러져 들어갈 것이다. 책은 차오르면 떠오른다. 요플레 하나를 다 먹지 못했으면 냉장고에 다시 넣어두면 된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며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험을 하는 것이며, 핥아먹는 일이며, 자신에게 진솔해지는 일이며, 순수하게 세상을 사랑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해내는 일이다.


완성하는 것은 그럼에도 중요하다. 사실 완성하지 못하면 그 글은 세상에 나와 숨을 쉬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결국 부패하여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본질을 잊도록 하고 조급해지도록 하는, 그리하여 글쓰기의 즐거움마저 빼앗는 성과주의적인 방식이다. 완성하라, 성취하라 등의 각종 글쓰기 인스트럭션에는 본질을 비껴가도록 만드는 위험이 있다. 글 앞에 앉아있는 신성한 순간을 타락시키고, 가장 평온해야 할 순간에 불안하도록 만들며, 깊이 파고들어야 할 덩어리를 얄팍하도록 만든다. 생명이 그런 것처럼 글쓰기도 그 자체로써 아름답고 경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느끼며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결과와 성취, 논리, 주술 호응, 맞춤법, 완성도, 탁월성, 그 외의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고, 다만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과 신경으로 핥아먹는 것이다. 그 점이 중요하다. 결국 내 글은 그렇게 나의 느낌과 기억과 상상, 세상을 더듬어가고자 하는 본능이 밀고 나간다. 언어라는 혀를 통해 어떤 주제에 관한 느낌이나 생각을 핥아먹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은 언제나 나의 일부고, 나의 일부는 곧 나다. 완성했든 완성하지 못했든, 성취했든 성취하지 못했든 말이다.


성직자에게 돈이나 이성적인 유혹이 악마 될 수 있는 것처럼 글 쓰는 이에게는 성취와 완성도, 또는 인정 욕구나 인기에 집착하게 되는 일 따위가 자신의 글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글을 쓰면서 집중해야 하는 일은 오직 쓰고, 쓴 글을 다시 읽고, 음미하다가 고민하고, 다시 쓰고, 주저하고, 망설이는 일이다. 요플레를 떠먹고 핥아 먹는 행위의 본질 속으로 빠져들려 한다면 딸기맛과 발효한 우유의 향미, 플라스틱 케이스의 불편한 날카로움 등을 온 존재를 바쳐 느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요플레는 한번 까면 반드시 끝까지 먹어야 해. 어느 순간에나 효율을 따져야 하는 비애를 느끼고 끊임없이 쫓기며 사는 내게, 누군가 슬그머니 다가와 귀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글을 쓰는 일도 그래야 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아 분노를 느낀다.


어느 정도 깨끗이 핥아먹었다고 느껴지면 그다음에는 구색이나 리듬, 그리고 어감까지, 가능한 한 모든 면에서 아름다워지도록 고치고 다듬는다. 그것도 핥아먹기일 수 있다. 붙들고 붙들고 또 붙들며, 핥아먹고 핥아먹고 또 핥아먹는 것이다. 효율적인 글쓰기 방법이나 바쁜 직장인을 위한 글쓰기 비법 따위는 없다. 바쁜 직장인은 그냥 바쁜 직장인을 하는 것이 좋고, 가장 어리석게 가장 비효율적으로 글을 써도 그냥 그러한 일체의 일이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가 글을 쓰는 것이 좋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많이 읽고 써보는 것.’이라고 했다. 김영하는 ‘지도가 땅이 아니고, 라면 사진이 라면이 아닌 것처럼 책 요약은 책이 아니다.’라고 했다. 글쓰기에 효율성이나 비법, 완성하기 등의 단어를 덕지덕지 붙이려는 알량한 구상 자체가 당치도 않다.


지금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글의 재료를 붙든다는 것에 관한 느낌들이다. 다듬는 일은 방법론으로써 배우고 익힐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은 어쩌면 글쓰기의 본질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작업이리라. 또 때로는 글쓰기 그 자체도 아니라 할 수 있으리라. 글쓰기의 궁극과 본질은 원천적으로 붙들고, 매달리고, 길어 올리는 시간에 있으니까.


그것은 삶이기도 하고, 삶을 포획하는 일이기도 하고, 삶을 밀어 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이 되었든 글쓰기는 더욱 생생한 감각으로 닿고, 파고 들어가고, 길어 올리는 어떤 의미로 가득 찬 일이지, 그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정교한 다듬기 세공 기술, 문장 비법, 포장, 편집하는 일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붙든다는 것은 문득 들었던 하나의 생각이나, 어느 한순간 마음에 깊이 파였지만 언어로 기록하지 않으면 스치고 지나가버릴 뻔한 느낌을 잡히는 대로 기록하는 일이다. 리소스 자체가 부족했는데 끙끙거리며 억지로 짜내어 괜찮은 글이 써지는 일은 내 경우 드물었다. 써서 꾸역꾸역 완성해도 억지로 쓴 부자연스러움을 나 자신은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팍팍하다고 느껴질 때는 글쓰기를 멈추고 그것과 전혀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이 좋다. 상관없을수록 좋다. 로맨틱한 글을 쓰고 있었다면 추리소설을 읽고, 논리적인 글을 쓰고 있었다면 로맨틱한 영화를 보거나 톰과 제리를 보면서 멍청한 표정으로 애플파이를 먹는 것이다. 정말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을 연결시킬 수 있으리라.


나는 주로 가득 들어찬 마요네즈 통을 짜듯 글을 쓴다. 느낌이나 생각의 글통을 가볍게 눌러 툭툭, 쭉쭉 짜는 것이다. 그 일이 언제나 수월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눌러 짜다가 구멍이 막힌 마요네즈 통이 뻐꾸기 폴더에 한가득이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나오는 만큼 짜는 것이다. 내가 그 주제와 관련하여 더 깊고 풍성하게 글을 쓰는 일이 필요하다면 또다시 마요네즈가 채워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료의 신선함, 즉 그것을 지금 기록하여 가둬두어야 한다는 긴급성이다. 중요성, 화제성, 완성도와 같은 외형적 가치 판단 요인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스스로 판정하며 조잡스럽게 고민하기에, 이 세계는 너무 넓고 아름다우며, 시간은 야속하리만큼 빠르게 흐른다.


그러나 쏘아놓은 화살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차나 비행기, 지하철이나 카페와 같이 어수선한 공간에서 그것을 붙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난 간절함에 의존한다. 대부분의 삶의 상황은 글쓰기를 위해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정말 수많은 변수가 시간과 공간에 둥둥 떠다닌다. 그러한 중에 오로지 글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그것만 붙들고, 그 외에는 노이즈캔슬링하는 것이다.


그것을 붙드는 행위는 때로 고되고 힘든 일이다. 내 체력의 조건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고,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때가 다반사다. 그럼에도 그것이 거의 글의 신선함과 질을 결정하는 단계가 될 수 있다고 느끼기에, 노인이 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며 물고기를 배에 길어 올리듯, 난 우선 글감을 배안으로 건져놓는 일에 상당한(때로는 거의 대부분의) 힘을 집중하는 편이다.


그것은 문득 눈에 띈 물고기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쫓아온 물고기일 수도 있다. 직관이 강한 기질의 내게는 대개의 경우 불현듯 찾아오는 감각의 모양새로 찾아온다. 내가 본 그것이 어떤 이성적인 통찰이라면 본론 한 복판의 어느 한 부분일 수도, 결론일 수도, 아니면 고작 프롤로그나 이미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에 마무리로 사용될 잔잔한 에필로그일 수도 있다. 미학적인 감각이라면 더욱 모호할 수 있다. 영혼의 심연을 건드렸을 뿐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눈치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면 생생히, 느끼고 생각하는 그대로, 가감 없이, 어떤 제한도 하지 않고 써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붙잡는 것grasping이다. 검푸른 강물 속에서 희멀건한 물고기가 보이면, 그 즉시 배에 다리를 걸고는 허리를 숙여 얼굴이 빨개져가며 손을 넣고 휘휘 저어가며 잡는 것이다. 그것은 펄떡이며 미끈거린다. 물고기가 다칠까 봐 망설이며 장고의 고민을 한 끝에 조심스럽게 붙들다가는, 손에 묻은 비늘 조각만 가지고 매운탕을 끓여야 한다. 무언가를 보았다면 우선 두 손을 담가 덥석 붙잡아야 한다. 머리채가 붙잡힐 수도 있고, 몸통이 붙잡힐 수도 있고, 꼬리가 붙들려 들어 올려질 수도 있다.


그렇게 싱싱한 채로, 생물의 물고기 전체를 들어 올려 뱃바닥에 패대기 치는 것이다. 기절하면 그때 배 안에 있는 수족관에 넣고 육지로 가져와 삶든지 굽든지 회를 뜨든지, 정교한 작업은 그 이후에 해도 된다. 숙련된 어부라면 이미 잡으면서 그 자리에서 회를 만들거나, 간단히 손질해서 라면을 끓여먹을 수도 있겠지만 난 아직 붙잡아서 배 안에 끌어올리고 바닥에 패대기치기까지의 과정도 무척 버겁게 하기 때문에 우선 살아있는 채로, 있는 그대로 흠집을 내지 않고 생포하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몸으로 부딪혀 생생히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이나 책이나 영화를 보며 깨닫거나 느끼는 모든 것이 재료가 된다. 그것이 중요한가, 가치가 있는가를 거르고 쓰려고 하면 이미 내 가치관과 경험이라는 필터 안에 갇히기 때문에 ‘나’라는 한계를 떠나지 못하는 글이 될 확률이 높다. 글이든 그림이든 설교든 무엇이든, 나라는 한계 안에 갇히는 것이 한번뿐인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그것이 하나님이든 넓은 세상이든, 사람이든, 지성이든, 무엇이든 나를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라면 우선은 남김없이 그물 안에 담아야 한다.


나를 벗어나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넓은 세계에서 무엇이든 신선하고 독특한 각각의 재료들을 우선 움켜쥐고 만지작거리며 느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어나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꿈꾸듯 난 글을 쓰며 꿈꾼다. 재료를 서걱서걱 잘라서 빨리 내놓으면 회나 봄나물이 될 수도 있고,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키면 삭힌 홍어나 요구르트, 치즈가 될 수도, 시디 신 김치가 되어 칼코롬한 김치찜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요리의 시작이 신선한 재료이고 그림의 시작이 화방에서 좋은 물감을 사는 것인 것처럼 글쓰기의 시작과 본질도 결국은 세계라는 광활하고 넓은 삶의 무대를 여행하며 끌어올리는 글감의 독특성과 싱싱함에 있는 것 같다. 아직 불완전하기만 한 나의 가치관은 그것을 검열할 자격이 없다. 우선 그래스핑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썼고, 이 재료도 훗날 다듬어질 것이다. 푹 삭혀서 코를 찌르는 홍어를 만들지, 얼른 오늘 저녁에 꺼내 싱싱한 회로 만들지는 이 재료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할 일이다.


우선 이렇게 잡아놓고 보는 것이다. 인생에는 우연이 없고, 모든 더러운 것들과 욕망과 고통과 실패와 절망은 언젠가 자기의 시간에 신기하게도 의미가 된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고, 사놓은 책 중에 읽는 것이라고 말한 김영하의 말을 나는 결국 세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고 위트이며 사랑이라고 느꼈다. 그의 독자들은 그러한, 그의 이 세계에 대한 폭넓고 깊은 사랑과 위트의 감각을 사랑한 것이리라. 사랑이 모든 절망과 무력함을 뒤집어버리는 희망의 수원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게 글이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어떤 생생한 질감으로써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남김없이 사랑하려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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