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4호선 막차.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금,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는 청장년 정도의 한 남성이 불과 반 걸음 정도 대각선으로 떨어진 뒤에서 한 젊은 여성이 몰두하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잠시 후 여성의 긴 머리를, 그리고 긴치마 아래의 다리나 발목을 차례차례 조목조목 본다. 뭔가 조금 이상하다. 남성이 조금 더 정방향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겨 계속 여성을 바라본다. 약간은 술에 취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일상적인 취기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뚜렷한 자아로, 선명한 의지로 시선을 옮겨가고 있었다.
아는 사이인가 했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따로 탔었고 그 순간에도 각자 따로 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여성은 지하철 문 옆에 기대 계속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고, 이제 남자는 여성이 잘 보이는 맞은편 의자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일부러 그가 여성을 볼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손잡이를 잡고 섰다. 창문으로 비치는 그의 모습을 보니, 하는 수 없었던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다. 적어도 내가 내리기 전까지 그는 여성을 더 이상 마음 놓고 볼 수 없었으리라 믿고 싶다. 그렇게 되길 바라며 나도 의식적으로 철벽 블로킹 포지션을 유지하려 애썼다.
젊은 남성이지만 그의 시선이라는 것은, 같은 남자가 느끼기에도 말할 수 없이 추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형이고, 삼촌이고, 남편일 수도 있는 그에게서, 그토록 말끔해 보이는 그의 존재에서 솔솔 악취가 나는 것만 같았다. 끔찍한 어른이었다.
내 안에도 그러나, 그가 있었다. 아마도 내 친구들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안에 그가 있을 것이다. 내면이 풍요롭지 못하면 눈과 귀가 거지 노릇을 하게 된다는 의미의, 어떤 글귀를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분법적 성속 구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내면이 충만하지 못하면 눈과 귀는 산만하고 분주해지는 것 같다. 대체재를 찾는 것이다. 가난한 영혼에게 유사 만족감이라도 달라. 구걸하는 것이다.
해석에 따라선 그 남성은 다만 건강한 남성일뿐이었다,라고 볼 수 있다. 약간의 일리가 있다. 그 정도 선명도의 프레임으로 보자면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선명도와 투명도를 높이고 싶다. 그렇게 혼탁하고 불투명한 렌즈로 세상을 보면 내 인생도 그렇게 될까 두렵다. 무엇보다 난, 고작 그 정도의, 고만고만하고 무난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오래전에 우연히 가톨릭 신학생들을 취재한 어느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다큐 초반 즈음 pd는 신학생들에게, 왜 신부가 될 결심을 했는지 공통질문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신학생이 했던 대답이 너무 인상 깊게 남아 지금까지 기억한다.
그는 ‘정말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온 마음과 눈빛을 다해 그렇게 답했다. 나도 정말이지, 그러니까 정말로, “잘” 살고 싶었다. 내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음이라든지, 신이랄지, 사랑이랄지 하는 모호한 주제에 집착하게 되곤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의 마음은 곧 나니까. 내가 믿고 목말라하는 것이 곧 내가 되니까.
이러한 연유로, 내 안의 미심쩍은 심리들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이해하려고 꼼꼼히 글을 쓰고 있다. 누구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도, 누구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글이란 이렇게 자세히 써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행위다.
정말로 무엇을, 누군가를 사랑하면 단순해진다. 정말로 누군가를, 어떤 대상을 본질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때는 말이 너저분해지거나 행동이 번잡해진다. 애착의 수신자 입장에서도 상대로부터 명확한 느낌을 느낄 수 없다. 정말 순전히, 순수하게 사랑하면, 또한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해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사랑과 낙관적 확신이 있으면 오히려 그 선명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 준비된 마음으로, 놀람과 숭고한 감정이 차올라 말이 없어지고 차분해지게 될 수 있다.
내가 어느 일 앞에서, 어떤 대상이나 사람 앞에서 동분서주하고 시선이 흩어지고 말이 많아지고 있다면 그를 아직 그윽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한가로운 너울거림이 아직 없기 때문, 그러니까 결국 그녀도, 나 자신도, 그 무엇도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외모 치장에 시도 때도 없이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한국의 대학생들은, 내면이 풍요롭지 못해 서구사회의 대학생들에 비해 외모 꾸미는 일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곤 한다는 주장은, 아예 사실과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다 맞는 말일 리도 없지만, 그러한 가정을 통해 말하려는 문제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학생의 본질은 연애다. 아니 공부다. 아니 연애도 공부도 아닌 어떤 광기에 가까운 순수함이다. 천편일율적인 헤어스타일과 옷차림과 화장, 완벽한 꾸밈은 대학생의 그것이 될 수 없다.
대학생은 평소 적당하고 자연스러운 캠퍼스룩이면 충분하고, 또한 그렇게 자연스러워도 예쁠 나이니까, 또는 안 예뻐도 아름다우니까,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학교를 다니며 내면과 지성을 가꿔나가는 일에 열중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이야기, 이제 누구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은 구글링으로 얻을 수 있고,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외모 관리 능력이 너무나 중요해진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한 내가 사대주의자도 아니지만, 서양의 여학생들이 학교에 갈 때는 너무 지저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잘 씻지도 않고 너무 같은 옷만 입고 학교에 온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 사회를 막연하게 동경하기도 하고, 진정하고도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높아 보이기도 하는 그들의 어떤 정신 세계가 부럽다고 느껴지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설교자가 맨지르르한 핑크빛 넥타이에 이탈리아 양복을 입고 설교를 하면서, 설교의 세부 항목, 그러니까 무슨 무슨 세 가지 법칙이니, 뭐 뭐 하라,라고 말하는 항목이 너무 많고 장황한 경우, 또는 언어가 과장되게 유창한 경우, 그에게서 외모만 한껏 꾸민 대학생의 빈곤한 내면을 발견한다. 대학생의 낮은 자존감과 함몰된 개성, 빈약한 자기 확신이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듯이 사역자의 빈약한 내면 상태는 사역자 존재 이외의 모든 형태로 나타난다.
설교의 대지가 네 개 이상으로 너무 많고, 언어도 지나치게 수려할 때 그 속에 설교를 밀어 올리는 오리진한 힘,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빈약할 확률은 반비례하여 높아진다. 설교자 개인의 내면도 아직 어떤 결핍이나 상처, 미해결 과제 등으로 얼룩져있어 누군가에게 자유를 전하거나 뭘 가르칠 만한 입장이 아닐 확률이 높다. 영혼이 가난하면 영혼 외의 것을 공작새의 깃털처럼 부풀려 과장하게 된다. 담백한 본질에서는 떠나 있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본질에 머물러 있으면 될 것을. 번지르르한 언어, 말끔한 헤어 스타일, 지나친 넉살과 값싼 유머는,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사역자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누구를 사랑해, 그러면 어떤 면에선 형식에서는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진다. 율법에 얽매여있는 율법학자들과 안식일 계명을 사랑으로 뛰어넘은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달랐다. 대학생활의 낭만적 요소에만 마음이 가있는 철부지 학생과 학문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학생 사이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리라. 누군가를, 정말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의 정화된 차분한 마음과, 누군가가 주는 부수적인 것들, 몸이나 경제적 능력 등을 욕망하는 사람의 분주한 마음 사이의 거리는 서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으리라. 공부나 인생을 깊은 눈빛으로 사랑하는 학생과 그저 청소년기까지의 미해결 숙제들이나 욕망 같은 것을 탐색하는 학생은 성서의 시편이 노래하는 의인과 악인처럼 멀리 있으리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역자와, 사역과 관련한 부수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사역자는 전혀 다른 존재다. 깊게는 언어나 삶의 선택에서, 얕게는 옷차림부터 눈이 깜빡거리는 모습이나 웃는 표정, 미세한 얼굴 근육의 경련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놀라울 정도로, 그들은 철저한 차이를 보인다. 삶의 리듬 조차 꾸밈의 사역자는 꾸밈 꾸밈 하며 흘러가고, 진정한 사역자는 진정 진정하며 흘러간다. (어쩌면 당장은 비록 깨어지고 부서진 박자처럼 보일지라도) 그 삶의 깊은 차원에서 그의 신적인 시간은, 어떤 깊고 진정한 박자로써 흘러간다. 꾸밈의 삶에는 한순간도 안식이 없다. 그들은 바쁘다. 욕망에 함몰된 학생이나 사역자나 연인은 모두 스스로를 꾸미는 일이나, 대상의 꾸밈을 취하느라 분주하다.
이렇게 보자면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가, 보고 있는 드라마가 무엇인가 등 내가 닿아있는 나 밖의, 거의 모든 접촉면이 나를 규정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랑은 얼마나 순도 높은 것인가 하는 것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투명한 통에 불과하다. 내가 세상에서 끌어 담아 넣고 있는 것에 의해 내가 정해진다.
하고 싶었던 말이, 그러나 인간의 일상의 추구가 꼭 고상해야만 한다는 도덕률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인간은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또 우리 안의 욕망이란 것은 어느 정도 관대함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투명한 심해어가 자신의 살과 뼈를 모두 내보이고 있는 것처럼, 모든 감정과 욕망을 투명하게 긍정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아있는 한 달리는 욕망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 있을 것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롤러코스터를 멈출 수 없을 것이고, 곧 그것이 내가 올망올망하게 살아있다는 증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매 순간 고상하고 거룩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고, 또 행여라도 그렇게 변해있을 미래의 나를 떠올리면, 그 모습은 끔찍하도록 숨 막히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면이 여전히 가난해 언제까지고 눈과 귀의 가난함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초라한 모습의 어른으로 살아가는 나를 떠올리면 그와는 비교활 수 없이 더욱 끔찍하다.
본질적으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내가 몸을 돌리고 서있는 큰 방향에, 내가 두발로 흙땅을 밟고 서있는 홀로로써의 존재의 하중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깊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나 자체로 빛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인가의, 누군가의 반영이 될 수 있을 뿐일 것이다. 책이든, 사랑이든, 신이든, 한낱 욕망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