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H에게

by jungsin

네가,

나의 외모를 좋아했는지.

뱃속 깊숙이 숨겨놓고 있던 열정을 좋아했는지.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던 나의 열병을 좋아했는지.

나는 알지 못해 H야.


우리는 고 1이었지.

그래 무려 고 1이었어.


난 내일 관심도 없는 시민 인문학 강의 따위를 촬영하러 가야 해. 그래. 생각보다 성공하지 못했지. 아니. 조금 더 깊은, 내가 생각하는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나름대로 꽤 성공하고 있어. 그때처럼 방황하고 있지는 않거든. 서른 살 무렵이었을 거야. 인생의 방향을 아예 바꿔 버렸어. 의미로. 그래서 이런 시간 난 참 좋아.


아니다. 사실 조금은 힘드네. 초라해. 나 원래 좀 겉멋에 사는 사람이었잖아. 터프하고 좀 자기중심적이었잖아. 교복 입고 실내화 신은 채로 카페에 가고. 메뉴판은 보는 둥 마는 둥 처음에 눈에 들어오는 커피 시키는 고등학생이었잖아.


팡세였어. 너랑 내가 고 1, 한창 설렘의 삼투압 작용을 느낄 때 만나기로 했던 카페 이름. 난 그 날 수업이 끝나고 우리가 팡세에서 만날 것이라는 사실에 학교에서부터 설레 했던 것 같아. 삐삐밖에 었던 시절. 음성 사서함으로 약속을 정했는지, 어떻게 만나기로 했었는지. 어떻게든 그 시대의 방식으로 약속을 했었고, 만났었지 우리는, 그 날. 이른 아침부터 네모난 교실에 갇혀 있었던 고되고 긴 하루가 다 지나가고,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에.


너는 팡세에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난 팡세 앞에 도착해서도 바로 들어가지 않았을 거야. 고 1. 이제 막 인생의 몽우리가 간질간질 생기기 시작할 때. 다른 학교 여학생과의 떨리는 만남이잖아. 나는 기다리는 너를 두고 괜히 작은 화장실 안에 들어가 초조해하며 거울 앞에서 교복 매무새나 머리 등을 가다듬었을 거야.


나는 너를 좋아하기도 했고, 아직 아니기도 했을 거야. 좋아하니까 설렜는데, 그건 아직 자이도취가 뒤섞인 설익은 감정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너무 어려, 고 1 남자애는. 특히 그 시대의 고 1 남자애는. 너를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 조차 떠올리지 못했고, 이해할 만큼 지적인 생명체도 되지 못했어.


그 시대에 태어난 남자는 또래 여자애보다 열다섯 살 정도 미숙하거든. 그러니까 난 이성에 관한 한 공감 지능이 두 살 정도 되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여자다운 글씨체로 예쁘게 글씨 써서 편지 쓰는 일 같은 것, 그때 그 남자애에게는 부질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 남자애는 너의 편지를 20여 년 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내 기억에 팡세에 가던 그날도 난 널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 우리 사이에 약간 긴장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어쨌든 너를 좋아했어. 그때 순수했던 그 고 1의 남자애는 널 최선을 다해 좋아했어.


파스칼이라는 사람도 몰랐고, 팡세가 그의 작품인지는 당연히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그 카페 되게 수준 있지 않았어? 90년대 그 시절에 카페 이름도 그렇고, 핑크빛 분위기에, 깊고 푹신한 소파. 아이보리색이었던가, 하얀색이었던가 그 소파. 그리고 아이리쉬 커피를 팔았다는 거.


너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었어. 네 앞에 놓여있던 잔에 들은 것이 커피였는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시킨 커피의 이름이 뭔가 우아했다는 것. 넓이가 넓은 잔을 아래 입술에 대고 기울여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입술에 붙어 다니는 까슬까슬하고 단 설탕의 감각. 아마 아이리쉬 커피였을 거야. 사실은 아이리쉬 커피가 뭔지도 모르고 시켰었어. 크고 둥그런 커피잔 테두리에 까끌까끌한 설탕이 붙어있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줄 알았어. 가령 설거질 깨끗이 안 했다든지. 실수로 설탕을 흘렸다든지.


여기까지 쓰고 네가 주었던 편지를 찾아보았어. 아, 없다 H야. 편지함 같은 곳에 늘 있었는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지금 다시 보고 싶었는데. 지금처럼 불행하고 불안하고 답답한 날. 네가 준 편지가 보고 싶었어.


집으로 보내 줬었잖아. 우편 번호 뭐뭐뭐. 이렇게 써서 우표를 붙이고. 대단한 시절이었어. 정말 낭만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네가 너무 가벼운 말들을 편지에 써놓아서(그것도 편지지를 빙글빙글 돌려가면서 한 가지 이야기씩 가볍게 썼었잖아 네가. 기억나는 단락은 지금 라디오에서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나오고 있어. 우리의 만남도 그런 걸까? 그런 식의 이야기들.), 그래서 난 또 그게 정말 한없이 가벼운 편지인 줄 알았어. 남자는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만 보거든. 특히 축구나 구기 운동을 좋아하고 뭐든지 직진이었던 10대의 남자애는. 배경이나 맥락까지 깊이 생각할 줄 몰랐던 거야.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데. 키스했었잖아. 아파트 잔디밭에서. 정말 난장판이었다. 아무리 짙은 까만색 밤이었다고 해도. 고 1 이 아파트 잔디밭에서 몸을 포개어가며 키스를 하다니. 아니. 달이 환하게 떠서, 그리고 그때만 해도 공기가 좋아서, 짙은 청색 밤이라고 해야 하겠다. 어쨌든 내가 한 일이잖아. 그렇지? 내가 주도한 거지? 전력 질주해 달려가거나 가만히 멈춰 서 있던, 모든 것이거나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곤 했던 내가.


아마 그때 네가 유독 예뻐 보였던 것 같아. 달빛에 비친 네 옆모습과 입술. 그런 것들이 열일곱 남자애가 참기는 무리였을 거야. 그래. 너 예뻤지. 깨끗한 얼굴에, 가끔 지하에 있던 제임스 딘처럼 어두운 곳에서 흘깃 보면 청순함의 끝을 보여줬었고, 화장을 안 해도 맑고 빛났어. 고 1의 너.


아무튼 네가 생각났다. 종종 생각난다, 실은. 요즘 내가 좀 힘들거든. 나이가 들면서 너무 민감해졌고 주변에 힘든 일도 많아. 그냥 삶이 너무 메마른 것 같아.


바이러스 때문이 아냐. 그까짓 마스크 따위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참 힘드네. 인생이 좀 무겁다, H야. 넌 날 뭘 보고 좋아했니? 그렇게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남자애를.


나 지금 잘못된 만남 들으며 글 쓰고 있다? 좋다. 정말 좋아. 좀 살아있는 것 같아. 지금 이 영혼을 가지고 열일곱으로 돌아간다면 나 너 정말 멋지게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중심적으로 이끌어가지 않고. 너를 바라보고 많이 묻고 너를 이해하려고 했을 것 같아. 잘 있니? 그때 나는 너무 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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