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그리워하는 걸까.
인생에서 한 번쯤은 꼭, 긴 파마머리의 여대생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는 꿈이었다. 이제는 거의 가망 없는 꿈이 되었다. 긴 파마머리의 여대생은 내게, 그러니까, 꿈결에 혼자 중얼거리기만 하는 잠꼬대 같은 그리움이다.
이루기 어려울 것 같은 꿈이 하나 더 있다. 한 번쯤은 꼭, 처음부터 끝까지, 불필요한 문장 하나 없이 담백한 진심만 담긴 글을 써보고 싶다. 가능하면 한 호흡으로. 며칠이 걸리더라도 한 호흡으로. 픽션도 괜찮다. 픽션이라면 오롯이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만 이뤄진, 찬란하고 아름다운 거짓말로 꽉 찬 글을 써보고 싶다.
전혀 멋을 부리지 않고 가면도 쓰지 않고 마지막 한 문장까지 용기 내어 진심만 꾹꾹 눌러쓰는 일. 그건 작문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한 개만 빼면 와르르 무너지는 젠가처럼 한 문장도 뺄 것 없는 담백한 진심의 문장으로만 이뤄진 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 그건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꿈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되는 일이든, 그런 글을 쓰는 일이든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시간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가슴이 벅차 숨이 찰 정도로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왜인지 그 일이 내게는 긴 파마머리 여대생을 만나는 일처럼,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아득한 꿈처럼 느껴진다.
그것들은 그러니까 긴 파마머리 여대생 같은 글, 또는 젠가 같은 긴 파마머리 여대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긴 파마머리 여대생이든, 젠가든, 그런 사람이 되는 일이든,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이든, 어쨌든 하나 같이 실현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실현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진정함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진정함과 싸운다는 것은 고상한 동시에 구질구질하고, 단순한 동시에 복잡한 일이다. 어떤 대상의 가장 은밀한 핵심으로, 가장 깊은 본질로 들어가는 과정이라면 아마 피할 수 없이 그런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철학이나 신학, 또는 예술이 그런 것처럼. 가장 상위의 학문들이 그런 것처럼. 나의 영혼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그런 것처럼.
긴 파마머리 여대생과의 연애와 진심의 문장으로만 이뤄진 글을 쓰는 것, 인생에서 둘 중 하나만 해볼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 첫 번째다. 첫 번째가 더 좋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첫 번째가 더 좋다. 더욱이 첫 번째 안에 두 번째가 포함되어 있으니, 첫 번째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 긴 파마머리 여대생과 같은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면 나는 사랑에 도취되고 청순함의 향기에 취해 정신을 잃을 것이고, 그것들은 모두 고스란히 버릴 문장 하나 없는 진심의 글을 남길 것이다.
많은 남자들은 긴 파마머리 여대생이라는 단어를 보고는 어리다든지 이십 대 여자라든지 여대생이라든지 하는 단순한 이미지만을 떠올릴 것이다.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거의 속물근성에 가까운 선입견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러한 꿈에 대해 운도 떼지 않는 것이다. 저속한 본능과 마초이즘적인 상상력으로 제한되는 비좁은 낭만의 세계는 참으로 쓸쓸한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그런 식으로 상품화하고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것, 자기중심적으로 느끼고 욕망하고 수납하며, 자기중심적인 이야기에 갇혀버린다는 것은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다.
긴 파마머리라는 단어가 은유하는 세계는 너무나 넓다. 이 단편적인 단서는 너무 넓은 상상의 여지를 허락한다. 이 글에서는 하나의 특징만 다루고 싶은데, 우선 그건 청순함이다. 그러니까 그건 팔구십 년대 시절에 여대생 누나들이 지나가면서 풍긴 랑데뷰 샴푸 냄새 같은 것을 실낱같은 근거로 삼아서 키워온 소년의 상상력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멸종되었다. 우선 이천이십 년에는 그 시절의 누나들이 했던 낭만적이고 레트로한 그 파마머리가 없어졌다. 그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그러나, 그러한 영혼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긴 파마머리의 영혼이 없어졌다. 이 즈음의 여대생들에게서는 긴 파마머리 여대생의 심상이랄까, 정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사라졌다. 설령 지금의 여대생들이 돌고 도는 유행을 따라 구십 년대의 파마머리를 재현한다고 해도, 이제 그들에게 구십 년대 여대생 누나들의 붉으스름한 여드름이나 맑은 느낌의 활기나 수줍음이나 풋웃음은 없다. 깨끗이 다 지워져 버렸다.
너무 쉽게 단정해버린 것일까. 어느 정도 그것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긴 파마머리도 있고, 그러한 정서까지 얼추 있다고 해도, 그러나 그 영혼은 없으니. 그 시대의 영혼이 없으니. 없는 것이다. 이제 내가 아는 긴 파마머리 여대생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긴 파마머리 여대생은 이 세상에서 다 부서져버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섹시한 사조의 패션 유행과, 케이팝과,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린 것이다.
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는 이게 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작금의 여대생은 청순함이란 단어 조차 작금의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다. 어떤 단어에는 동시대의 시간과 공간과 사회 분위기에 기대어 이해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 있다. 시대의 영혼이 어느 단어 안에 프레온 가스로 압착 밀봉되어 고스란히 갇혀 있다. 미래 세대의 누군가 ‘긴 파마머리 여대생’이라고 발화한다고, 그 의미가 그대로 터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정령과도 같은 정신과 공간 감각을 펑 터트리지 않으면 원뜻을 남김없이 알 수는 없다.
청순함이란 가치는 버려야 하는 것, 또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배우고 공부하고, 믿게 되어버린 이 시대의 키즈는 그 단어를 잃었다고 해야 한다. 이제 아마 오래도록, 어쩌면 영영, 긴 파마머리 여대생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청순함이라든지, 깨끗함. 그리고 포카리스웨트, 캔디바. 희망, 꿈, 열정, 자유, 파랑새, 파란 하늘. 모두 이미, 더 이상 그때의 그 단어가 아니다. 다른 분위기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단어를 잃어버림으로써 결국 상상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가장 비극적이다. 이 문제의 본질이다.
나조차, 사실은 모른다. 긴 파마머리 여대생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청순함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건 아직 여성에 관해, 여자 방, 여자 기숙사 등에 대해 신비한 감상과 기대를 갖고 있는 남자만 가질 수 있는 어떤 환상 문학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어쩌면 실존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감수성이 예민한 뭇 소년들의 마음속에 만 무형의 고고학 유물처럼 남아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저씨가 되어버린 소년의 영혼 속에서만 훨훨 날아다니는 유니콘일지도 모르겠다.
이천이십 년에 이러한 이야기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두려운 마음으로 쓰고 있다. 첫 문장부터 진심만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이미 수많은 자기 검열을 거쳐 정제된 문장들만이 나부끼고 있다. 정제하지 않으면 야한 얘기가 될 것인가.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순수한 꿈 같은 것이다. 소년의 영혼에게 그것은 날아라 병아리, 메칸더 브이, 태권 브이에 가까운 것이다.
왜 생머리는 아니냐. 오히려 청순함의 상징은 생머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건 생머리는 영영 가지지 못할 청순함 같은 것이다. 적어도 내게 그건 반드시 긴 파마머리여야 했고 여대생이어야 했다. 대학교를 안 다녀도 그러한 느낌이어야 했다. 그 지점이 나에게 있는 독특한 목마름인 것이다.
친구들이 긴 생머리에 우수에 찬 큰 눈을 깜빡이는 하수빈이나 강수지 같은 누나들을 좋아할 때 나는 그녀들이 어딘지 싱겁고 허전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긴 누나들이 티브이에 한창 나오던 시절, 처음에는 나도 덩달아 흠모하곤 했지만 이내 언제부턴가 시큰둥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인형 같은 눈을 똑같이 깜빡이며 노래하는 브라운관 속 그녀들에게 더 이상 새로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실망스러웠다. 알싸한 오렌지 환타를 마시고 싶은데 초정리 광천수 사이다만 내 앞에 내미는 것 같았다. 예뻤지만 매력적이진 않았다.
유사한 예쁨을 품은 수많은 원들이 나선형 철 스프링처럼 포개어 그려져 있고, 그 원들을 헤치고 들어가면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가장 진한 선으로 그려진, 작은 원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원은 긴 파마머리 여대생이다. 결정적인 느낌은 반드시 긴 파마머리 여대생에게 있으리라 믿었다. 생머리의 청순함은 어딘지 조금 지루하다. 하지만 긴 파마머리에는 용기와 모험, 즐거움과 자유분방함이 있다. 지루하지 않은 청순함이 컬을 타고 물결치며 흘러내린다.
파마머리 여대생이 무슨 나에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같은 것인가 하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오로지 섹슈얼리티라면 아니고 그것을 포함한 순수함과 그리움 같은 것이라면 조금은 가까운 느낌일 수 있다.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는 페르소나를 벗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직면하고, 이해하고 싶어서다. 살아가며 잊어버린 꿈들을 언어로 정리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시절의 쓸모없고, 유치하고, 낯부끄러운 환상과 꿈들은 그것 너머의 어떤 그리움을 지시하고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긴 파마머리 여대생은 은유나 상징일 것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이성을 만날 때 나의 마음에 대해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 나를 모른다. 나를 몰라 여전히 굵고 멋있는 목소리나 내려하고, 근사한 이야기를 하려 든다. 그렇게 나를 모르고, 내가 목말라하는 것을 모르고, 그런 나를 좋게 봐주는 상대를 모르다가 견고한 이해의 과정을 생략하고 갑자기 맥락도 없이 진한 관계로 넘어가면 스스로 얼마나 절망적인 느낌에 빠져들지가 두렵다.
비단 이성뿐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꿈꾸는 것,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나를 알지 못할 때는 죄다 영혼 없이 구천을 떠도는 귀신 만담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세월이 지나 에우고 흘러 흘러 이제 와 겨우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는 아름답고 뭉클한 일이 된다. 가치 판단을 걷어내면 모두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들이다. 두려움을 걷어내면 내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