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것에 관한 소묘.

흰눈이 펑펑, 눈이 부시다.

by jungsin

1월 1일이다. 어제는 한해의 마지막 날이자 스타벅스 다이어리 증정 마지막 날이었다. 난 여느 겨울과 작년 겨울은 스타벅스를 그렇게 많이 가지 않았다. 다이어리 증정 이벤트 마지막날인 어젯밤이 되어서야, 지인 기부 찬스를 쓰며 가까스로 e프리퀀시를 모두 모았다. 하지만 이벤트 종료가 불과 몇 시간밖에 안남은 시간이었고, 다이어리는 이미 품절이었다.


다이어리가 추가로 입고되면서, 다이어리 증정 기간이 연장될 수도 있지 않을까. 헛된 기대는 그만두고, 지금이라도 얼른 완성한 e프리퀀시 이용권을 음료 쿠폰 두장(다이어리 소진 시 증정해주는)으로 바꿔야 하나. 그런 작고 작은 고민들을 하면서 마감시간이 가까워질 무렵까지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마감 15분 정도를 남겨두고 슬슬 일어났다. 혹시 어제 잃어버린 충전선이 아직 그 자리에 있을까 확인하려고 매장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는 테디베어(덩치는 크지만 정말 테디베어처럼 귀여운 바리스타. 남자.)가 테이블마다 돌며 클로징 타임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수년간 농담을 주고받으며 친해진 사이다. 큰 탁자 밑에 있는 코드에 케이블이 아직 꽂혀있을까, 고개를 숙여 확인하고 있을 때 테디베어와 눈이 마주쳤다. ‘뭐 찾으세요? - 충전선이요. - 검은색? - 네. - 5핀? - 네. 옛날식 충전선이요. 그 선을 5 핀이라고 하나? - 기다려봐요.’ 남자 친구였다면 듬직할 스타일이다.

테디베어를 만난 김에 다이어리 건 문의도 해결하려고 운을 뗐다. ‘저 e프리퀀시 다 모았어요. - 아놔 그럼 빨리 내려가요. 오늘 써야 돼요. 다이어리 몇 개 모았어요? -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 근데 저번에 보니까 나중에 다이어리 추가 입고되는 경우가 있던@$##@ - 아 빨리 가요, 빨리. ㅎ 문 닫을 때 됐는데 뭐 하고 있었어요.ㅎ’


그는 외향형 곱하기, 급한 성격 곱하기, 츤데레 지수 익스트림이다. 껍질은 데레고 속은 츤으로 꽉 찼다. 우린 누가 봐도 친하지만 언어가 다르다. 언제나 서로 각자의 말을 한다. 앞으로도 우리의 언어가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귈 것이 아니라면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테디베어에게 연행되어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서는 시크 레이디(차가운 온도로 일 중심적으로 정확하게 일하는 바리스타.)가 무시무시한 시크함을 풍기며, 포스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레가 껍질이고, 내용도 데레로 꽉 찼다. 거기다 여자 사람. 지구 상에서 내가 코브라 다음으로 어려워하는 생명체 종이다.


포스기가 아직 10미터는 남았는데 벌써 떨렸다. ‘빨리 음료 쿠폰으로 교환해요.’ 테디베어. 그 다음에는 의식이 흐려졌다. 이후에 시크 레이디 앞에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생각이 안 나지만, 어쨌든 e프리퀀시 티켓을 무료 음료 쿠폰 2장으로 교환했다.

그리고 이제 현장에서 바로 테이크 아웃해가야 하는 음료 선택을 앞두고 있었다(현장 주문 음료를 필히 포함해서 총 세장의 쿠폰을 주는 것이었다). 긴장한 나머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말했다. 무료 음료 쿠폰은 이 매장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사용권이었고, 난 가장 싼 음료를 주문했다. 시크 레이디와 나 사이의 실존적 거리감을 말해주는 가격차였다. 도토리를 찾아 깡충깡충 뛰어다니다가 코브라 앞에서 얼어버린 다람쥐처럼, 그때 난 두뇌활동이 마비되었었다.

‘사이즈 업그레이드도 되나요? - 추가금액 결제하시면 돼요. - 아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로 주시고요. 아아, 잠시만요. 현금 좀 가져올게요. - 죄송하지만 현금 없는 매장이라서, 결제하실 수 있는 카드는 없으세요? (코브라가 날 집어삼키려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느낌을 받았다.) - 네, 현금 밖에.. - 그럼 이번에는 할 수 없이 현금으로라도 해드릴게요.’ 인심을 쓰듯 말했다. 역시 시크 레이디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굽신굽신 거리며 고맙다고 했다.

뒤로 돌아 성큼성큼 창가에 있는 자리로 갔다. 정신없이 가방을 뒤지며 지갑과 텀블러를 찾았다. 텀블러에는 내가 추출한 아이스케냐가 남아있었다. 코브라에게 등을 보이며 추잡스럽게 고개를 젖혀 허겁지겁 후릅후릅 아이스 케냐를 마셨다. 어렸을 때 치과의사 선생님 앞에서 입을 벌릴 때처럼 소심하게 입을 벌리고 마셨다. 얼음까지 입에 넣어서 다시 텀블러에 뱉었다. 두피에서 식은땀이 몽글몽글 나는 것 같았다. 잠깐 뒤를 돌아보았는데 코브라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얼른 뒤돌아 포스기 앞으로 깡충깡충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텀블러에 음료가 남아있어서요(추접스럽게 마시고 오느라고 늦게 돌아왔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굳이 해명을 했다. 시크 레이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감시간이 정말 코앞으로 임박해왔다. 하지만 텀블러에는 아직 아이스 케냐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난 음식을 좀처럼 버리지 않는 병에 걸렸다. 아까움과 강박증, 엄격했던 아버지의 교육 등이 뒤섞인 문제였다. 그녀가 결제를 진행하는 동안 코브라의 품에서 풀려난 다람쥐처럼 벌벌 떨며 컨디 바로 갔다. 아이스 케냐 잔해를 추릅 추릅 마저 마시고 얼음을 버리려고 했다. 하필 그 찰나에 테디베어가 내게 다가왔다. ‘뭐하세요? 왜 여기 있어요? 텀블러 얼른 바리스타한테 갖다 주세요. - 이거 버리려고요. - 얼른 일로 와요. 바리스타한테 주면 돼요. 갔다 주라고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요.’ 나도 알지만.






스타벅스를 나왔다. 효도하려고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러 갔다. 난 5분 늦게 도착했고, 많은 인파로 부모님과 함께 앉는데 실패해서 고3 학생들 사이에 앉았다. 갓 수능을 마치고 한 시간 뒤면 스무 살이 될 고3 학생들은 생동감이 넘쳤다.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교제한 학생들인 듯, 남녀의 경계가 거의 없이 스스럼없이 장난을 쳤다. 얼마나 자유분방해 보이던지. 그들의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은 가히 그 무엇보다 부러운 것이었다. 꿈같은 스무 살 시절로부터 한참을 더 꿈꿔온 나는. 꿈을 채웠어야 했던 내가 오히려 꿈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무 살보다 두배는 더 넓어졌어야 했던 내가 오히려 한참은 더 좁아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조악하고 왜소해져 있는 다람쥐 같은 내 모습에 대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다람쥐란 무엇인가. 코브라란 무엇인가. 테디베어란 무엇인가. 문득 깨달았다. 내 가방에는 텀블러가 세 개 있었다. 비어있는 텀블러 두 개를 두고 그 난리를 피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자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마음에서 심각한 바람이 새어 나오다가, 왜인지 문득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한동안 가족의 병환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지나가길 바라던 뜨거운 여름이 갔고, 차가운 겨울이 왔다.

e프리퀀시 모으기에 연연하고, 진작에 받을걸 자책하고, 다이어리 수량이 남아있는 매장을 치열하게 찾으며 고민하는 순간. 편한 옷 잡히는 대로 대충 걸쳐 입고 롱 패딩으로 온몸을 덮고, 추위를 뚫고 나가 커피 한잔 옆에 두고 카페에서 아무 쓰잘떼기도 없는 글을 쓰며 히죽히죽 웃는 순간. 심심하고, 지루하고, 소박하고, 부끄럽고, 초라한 모든 순간들. 올해도 어김없이 그런 연말이 찾아온 것이 감사했다. 치과의사 앞에서처럼 벌린 입이 부끄럽지 않고, 그런 내가 귀엽고, 감사했다. 추잡스러운 등과,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테디베어에서 시크 레이디까지. 바닐라 플랫화이트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하늘에 흩날리는 하얀 눈조각 알갱이들처럼, 낱낱이 모두,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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