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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13. 2017

망설임으로 시작한 올레 8코스

너구리 제주를 걷다 2_약천사에서 대평포구까지(2014년 10월 5일)

올레길을 걷는 두 번째 날의 발걸음은 사실 망설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고민이다. 한라산을 오를까. 아님 어제에 이어 8코스를 계속 걸을까. 아님 훌쩍 뛰어넘어 올레 10코스나 11코스의 어디쯤으로 달려갈까. 사실 망설일 때의 결정은 주변 사람들이 어떤 조언을 하느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8코스가 최고라고 추천한다. 추천을 무시하기 쉽지 않다. 어제 언뜻 본 약천사를 시작으로 방향을 잡았다.

약천사 모습

약천사부터 시작한 발걸음은 시간이 조금 일렀는지 아무도 없이 호젓하고 썰렁함이 함께 찾아드니 멋쩍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전 서귀포 방문 시 와본 약천사의 기억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그대로다. 좀 더 관광지스러운 분위기가 강해진 느낌.  조금은 절이 박제가 된 듯한 느낌이다. 관광지를 목표로 만든 절이 아닐 테지만 결과적으로 관광지가 되어버린 구도 공간의 운명을 조금은 아쉬움으로 바라봐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멋진 절인 것은 분명한데 절 자체는 사실 구경거리가 될 것도 없다. 


내가 여기에 관광하러 홀로 걷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난 이 곳에서 무엇을 보면서 지내는 것이어야 하는가. 3배 후 차분한 감정을 갖기보다는 낯섦이 먼저 다가오는 바람에 자리를 일어섰다. 도로변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가다 보니 우습게도 어제 묵은 숙소 앞까지 다 달았다.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니 이리되었구나. 원위치로 돌아오자 맥이 빠지고 편의점에 앉아 빵과 우유를 먹는다.  오늘의  아침이다. 점심 전까지는 얼마나 걸어야 식사를 할 수 있으려나. 

3배 후 차분한 감정을 갖기보다는 낯섦이 먼저 다가오는 바람에 자리를 일어섰다

바다를 향해 걷는다. 어제 만큼 바람이 불지도 않고 화려한 광광명소도 비교적 적다. 그러던 중 갑자기 관광지가 나타나고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올게 왔구나 조경도 멋지고 건물도 멋지다. 괴리감이  밀려온다. 중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의 정원들을 거치고 들락날락해보니 발이 너무나 아프고 이 길을 걷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나는 이곳에 생각을 하러 왔다고 했는데 멋진 조경과 호텔의 멋스러운 빌딩, 그곳에 머무는 자들에 대한 부러움이 내 시선에 가득 배어 있을뿐더러 때로는 시기와 질투 때로는 경멸이 함께 나타났다. 

모든 감정을 다 합쳐놓으면 내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뭉쳐지게 된다. 바닷가와 중문단지의 아스팔트 도로변을 끝도 없이 걸으며 녹초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 이곳을 벗어나고자 옆의 해안으로 다 달으려 했을 때 그곳은 새로운 리조트의 건설공자가 한창이다. 건설현장을 멀리하기 위해 한참을 돌아서 고즈넉한 마을길로 들어선다. 비록 보도블록과 아스팔트여도 이 고즈넉함 속에서 걸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힘들게 힘들게 바다를 향해 걸었고 이윽고 해안도로에 다 달았다. 어제 숙소에서 함께 묶은 원주 출신의 4명을 다시 만났다. 목표를 세우고 하루에 2코스씩 걷는 산악회 회원들의 올레행 걷기는 아무리 봐도 어색하기 그지없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목표를 세워 걷고 있는지. 어젯밤 일부 인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자신들도 의미 없음을 토로하는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비록 보도블록과 아스팔트여도 이 고즈넉함 속에서 걸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제주 여행에서 숙소에서의 만남과 술자리를 기대했고 자신들만의 목표 달성도 의미가 있었을 터 그 느낌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곳 해안가 식당에서도 혼자 먹을 수 있는 식사 거리는 없다. 주인장 조차 혼자 밥 먹기 힘들고 마땅한 메뉴가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갈 때까지 가보자. 그러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침에 먹은 빵고 우유가 결국 오후 2시가 넘어서까지 먹은 최후의 정찬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제주도스러운 해안을 계속 걷는다. 그 걸음에 순간순간의 호응은 있지만 바다는 오래도록 계속해서 쳐다보면 큰 감동을 주기에 쉽지 않다.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이다. 아마도 어제 이 바다를 처음 만났더라면 나는 내심 감동으로 한참의 소설을 쓰고 있었으리라.  화려한 바다를 이틀 연속 보다가 지금은 그보다 조금 못한 바다를 보고 있는 셈이니 무엇으로 그 밋밋함을 극복할 수 있으랴. 사실 이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감흥을 줄 풍경인데도 서시히 무뎌져 가는 자신을 보고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본다.


목적지에 다 달았다. 중간에 이쁜 포구도 만나고 그럴듯한 해안들도 만나고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지금 제주는 개발로 폭발 직전이라는 사실이다. 곳곳에 전원주택과 빌라 카페 리조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목적지인 대평포구에 도착했을 때도 이 오지스러운 제주도의 남서쪽에 왜 이리 카페와 전원주택 펜션과 리조트가 계속 들어서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한라산이 보이지도 않는 제주도라니. 묘한 산이 앞길을 막고 구불구불한 버스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제는 해안가가 끊겨버린 장천리 화순 금모래 해변까지 가려면 해안길은 포기해야 한다. 산길을 돌아 하루 종일 다음 코스로 가기에는 더 이상 내가 올레길을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제주시로 가련다. 하루밖에 묶지 않은 숙소지만 그래도 나는 제주에 돌아갈 곳이 있지 않은가. 내 숙소로 돌아가리라.

나름 예술가들의 모임이 있는 듯한 마을을 남겨두고 화순으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도시풍의 멋스러운 젊은 사람과 50중반의 초라한 사람이 7코스의 폭포를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내가 어제 겪어본 길로 볼 때 그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검증할 수 없는 각자의 이야기로 끝을 낼 수 없었다. 다만 지도의 한 부분을 서로가 타협해서 그곳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외돌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한 명은 그곳을 자꾸 애오개란다. 저 친구는 서울 5호선 지하철 역인 애오개역을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다행히 순환버스가 도착했고 한 명은 남고 한 명은 그 버스를 탔다. 아름다운 이별이다.

저 운전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리기 전 물었으면 올레길 가는 행색인 내게 자동으로 시작점을 알려주는 것일까. 웃음이 나왔다

몇 명 타지 않은 버스가 고개를 넘어 화순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사람들은 차례로 정류장을 내린다. 내가 내릴 때 버스 운전사는 나에게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10코스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손짓으로 좌회전을 하라고 계속 일러준다. 친절하지만 귀찮은 표정이 역력하다.  내려서 다음 코스로 가려는 게 아닌데. 저 운전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리기 전 물었으면 올레길 가는 행색인 내게 자동으로 시작점을 알려주는 것일까. 웃음이 나왔다. 난 단지 화순이 궁금했고 제주시내 가는 버스를 타고 싶을 뿐이었는데.


헷갈리는 버스정류장과 안내표시판의 오류로  4차선 도로를 네다섯 번 계속 맴돌며 왕복했다. 갑자기 길 앞의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은 아직이었다.  메뉴를 쳐다보니 물회를 팔고 있다. 무조건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제주시  버스를 타려면 어찌해야 하냐는 질문에 건너서 타면 된단다. 운전사에게 물어보란다. 그게 정답이다. 그 누구보다도 운전사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을터. 식사를 마치고 나니 주인아주머니는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가라며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틀에 박힌 커피를 한잔 타서 준다. 나가기 전 이 물도 가져가면서 마시라고 작은 생수병에 물을 담아준다. 귀찮음과 몸에 배어있는 친절함이 함께 있다. 아까 운전사도 그렇거니와 이 아주머니도 전혀 요청하지 않았는데 그동안의 나 같은 행색을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버스 운전사도 그러하거니와 식당 아주머니도 친절함이 배어있는 인생이 귀찮음을 살짝 누르고 있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대표는 제주의 올레를 걷고 온 내 모습이 다소 못마땅한 느낌이다. 나에게 제주의 자연을 많이 접하는 것도 좋지만 제주의 사람을 많이 접하는 게 더 중요하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제주에 아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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