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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17. 2017

너구리 제주를 걷다 3_제주 도심의 동쪽

2014년 10월 19일 올레길 18코스 원도심에서 삼양까지 

바쁜 토요일을 보내고 일요일을 맞는다.


토요일은 하루하나 벼룩시장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일간지  사진기자 출신 선배의 집들이가 있어 낯선 장소이긴 해도 다녀와야 했다. 오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찌어찌 돈을 모아 1천여 대의 카메라를 수집하고 4백여 개의 오리를 모아 소장하고 있는 사람. 제주에 20여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15년 전에 이미 4천 평이나 되는 땅을 사둔 사람. 그리고 올봄에 집을 짓고 자신만의 너른 공간을 갖고 말년을 준비하기 위해 편안한 노후를 선택한 사람. 모두 같은 사람의 상황인지라 몹시 부럽기도 하면서 나와는 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세상을 어찌 살았나 싶다. 진짜 반성이 된다. 


그런 기분을 뒤로하고 제주시를 걷기로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제주시부터 동쪽으로 가는 길이다. 이호태우 해변을 통해 제주시로 들어오는 길은 차를 통해 몇 번 돌아보고 버스도 자주 타서 그런지 썩 내키지가 않는다. 대신 가본 적 없는 동쪽을 택하기로 했다.

시작점은 동문로터리부터 하란다. 버스를 찾아 내렸다. 산지천이라는 천이 나왔다. 맑은 물을 가지고 있다. 일부 구간은 공사 중이기는 해도 예전의 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려는 것인지 괜찮은 노력으로 보인다. 제주 바다로 바로 흘러간다.


동문재래시장이다. 저녁에 오면 꽤 북적일 듯싶다. 관광안내서 등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시장인만큼 시장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법한 곳이다. 괜스레 발길을 돌려 아무 길이나 들어가 한번 훑어보고 나온다. 시장을 그냥 지나치는 건, 더구나 재래시장을 그냥 보내는 건 아무래도 예의는 아닌 듯싶다. 그러고 보니 제주에 내려와서는 오일장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제주 오일장을 우선적으로 방문해 보련다. 

모슬포항은 먼 남쪽의 항구에 와있다는 느낌이라면 이곳은 인천이나 목포 군산의 항구를 연상케 한다

발걸음은 금새 제주항에 닿는다. 올레길은 이 길이 아니겠지만 옆으로 살짝 새서 항구를 보고 싶었다. 항구의 끝자락에 배들이 정박해있다. 아마도 밤이 되면 잔뜩 불을 켜고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오늘이 일요일이라 쉬는 날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사람 한 명 없는 항구의 끝자락을 걷고 있다. 선원 관련 건물들이 여기저기 서있고 이 낯섦은 인천 출신인 나도 어쩔 수 없다. 항구만이 갖는 묘한 낯섦과 설렘이 함께 있다. 이전의 모슬포항과는 또 다른 익숙함과 낯섦이 겹쳐있다. 모슬포항은 먼 남쪽의 항구에 와있다는 느낌이라면 이곳은 인천이나 목포 군산의 항구를 연상케 한다.곧 그 연상이 일부는 맞고 일부는 역시 다르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제주여객 터미널은 앞에 두고 발길을 우측 언덕으로 향했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사라봉이다. 사라봉. 위쪽에 자그자그마한 아파트와 빌라들이 잔뜩 서있고 그중 바닷가를 향해 나있는 오래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보고 싶은 바로 장면이다. 인천의 자유공원이 있는 지역이나 목포의 유달산에 가면 있는 아주 흡사한 모습. 항구 앞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오래되고 낡은 집들. 왠치 모를 정감을 주면서 고향 같은 느낌을 함께 제공한다. 내가 그곳 출신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건입동의 주택과 항구도시에서 쉽게 보여지는 모습
사라봉에서 바라본 제주시 원도심과 멀리 도두봉의 모습

단 하나 이곳에서 보이는 풍광이 인천과 다르다. 인천이 항구를 향하되 탁한 색깔의 바다를 향하고 있다면 이곳은 말 그대로 파란 바다를 향해 집들이 서있다. 역으로 혹시 산토리니 같은 느낌을 조금은 풍긴다고나 할까... 항구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주항과 카페리호가 눈에 들어온다. 운치 있는 풍경이다. 이날 오후 한나절을 걸으면서 계속해서 이 항구의 모습이 눈에 떠나질 않았다. 이 항구 주변을 걷는 하루였다는 소리다.


다양한 주택을 지나 나지막한 봉우리를 향해 올랐다. 공원처럼 잘 꾸며놓은 길이었고 편안한 산책로다. 사라봉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내 어릴 적 추억의 장소를 떠올린다. 인천의 주안과 도화동 그리고 제물포라는 지역이 둘러싸고 있는 조그마한 봉우리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그 동네로 전학와서 아직 개발 전인 산을 휘젓고 놀러 다닌 적이 있다. 그곳의 움푹 파인 계곡 안에서 야구도 하고 봄에는 풀밭에서 들꽃을 따서 반지와 목걸이도 만들고 진달래꽃을 따서 꿀을 빤다고 쪽쪽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코 밑에까지 아파트가 다 들어차고 차들이 산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도로가 뚫렸지만 그 산은 나에게 시골과 같은 추억의 장소였다.

지방 혹은 위성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화려한 도심이 아니라 도시화는 돼가지만 주변화도 동시에 진행되는 도시. 그곳이 위성도시의 역할이고 운명이다

어느 정도 개발이 진행되면서 그 산, 정확히 수봉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의 정상은 주민들의 휴식처가 됐고 전망대 역할의 정자와 체육시설이 자리 잡게 된다. 그 자리를 수도 없이 올랐고 특별히 갈 때가 없으면 괜히 올라서 인천의 낙후된 집들의 지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곳을 떠나야지 결심(?)을 하곤 했다.


그 느낌이 이곳 사라봉 정상에 그대로 전해왔다. 물론 인천 수봉산보다 훨씬 자연보존이 잘 되어있고 시야에서는 파란 제주항과 바다가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제주의 시가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수봉산과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는 터였다. 이 동네 이름이 건입동이라고 했던가. 그 동네에서 보는 제주시는 예전의 인천과 흡사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지방 혹은 위성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화려한 도심이 아니라 도시화는 돼가지만 주변화도 동시에 진행되는 도시. 그곳이 위성도시의 역할이고 운명이다.


이곳 제주는 위성도시도 아니고 우울함이 적지만 도심의 발전 정도로 보면 어차피 제주의 신시가지는 여기서 보이지 않고 여기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항구도시 아니던가. 그래도 자연조건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있으랴... 

사라봉을 뒤로하고 동쪽으로 향했다. 향하는 내내 제주항과 함께 한다. 멀리서 보이는 제주항의 운치도 좋지만 해안을 따라 걷는 한쪽에 제주항은 늘 배경 역할을 해준다.


문뜩 바다 위로 끊임없이 내리는 비행기들 사이로 유람선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제주만이 가질 수 있는 풍경이지 싶다. 파란 하늘과 함께 착륙하는 비행기가 연신 계속되는데 여객선도 제 갈길을 가려고 서서히 자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구의 다른 시스템이 다 잘되어 있을 테지만 저 녀석 하나만으로도 그 느낌은 새로움을 주고 있으니 제 역할은 충분히 다하고도 남는다

제주의 이 가을 날씨를 비난할 수는 없다. 혼자 걷는다는 것이 속상하고 야속하지만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내가 만들어낸 업보가 지금의 내 발걸음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걷는 내내 뒤돌아 보면 보이는 등대가 운치를 더해준다. 나머지를 보면 특이한 면도 없어 보이는데 언덕에 서있는 등대 하나가 전체적인 풍경을 새롭게 다가오게 한다. 등대 lighthouse, 이름만으로도 설레게 한다. 하물며 항구의 다른 시스템이 다 잘되어 있을 테지만 저 녀석 하나만으로도 그 느낌은 새로움을 주고 있으니 제 역할은 충분히 다하고도 남는다. 


나는 이렇게 잔잔하고 썰렁한 선착장을 본 적이 없다. 고깃배가 아닌 여객선이 접안하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통상 항구에 닷을 내린 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황과 달리 널따란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여객선은 여행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참 좋은 날씨에 고요한 바람이다. 오늘처럼만 바다가 잔잔하다면 여기는 적도 주변의 어느 지역이라고 말해도 어울릴 듯한 뜨거운 가을 날씨다.


그렇게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걷다 보니 돌담이 여기저기 막혀 있는 지역을 지나게 된다. 돌담만 있고 마을이 없다. 유적지란다. 곤을동이라고 했다. 4.3 때 초토화되어버린 마을이다. 흔적이 남아 있다. 슬픈 과거를 지닌 지역. 역사는 공교롭게도 즐거웠던 시간보다는 슬프고 기억하기 힘든 사건만을 그 흔적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살아가는  힘을 주기도 한다. 


특히 제주도는 곳곳에 4.3의 흔적이 너무나 많아 이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좌우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제주도 전체의 아픈 상처이니 말이다. 


곤을동을 넘어 화북으로 향하는 길을 나오니 이제는 제주시내의 느낌은 완벽히 사라졌다. 한적한 시골길과 함께 운치 있는 포장길이 해안선과 연이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곳의 무엇을 보러 온 것일까. 방파제 너머 현무암 바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왔는가. 아님 무슨 다른 깨달음이라도 얻기 위해서인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제주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걷기로 했다. 그래도 피곤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을 생략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한 주 내 내 술에 절어 있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견뎌내기 힘들 것 같다.

역사는 공교롭게도 즐거웠던 시간보다는 슬프고 기억하기 힘든 사건만을 그 흔적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살아가는  힘을 주기도 한다

솔직히 이제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해안가는 조금씩 질리기 시작한다. 모래 해안이 그립니다. 현무암은 한번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너무 거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제주도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해안선이라는 점에서는 바다의 색깔과 함께 가장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 현무암덕에 흐린 날 제주는 더 우울함을 준다. 저 여객선은 항구를 빠져나오더니 서서히 제갈길을 간다. 아마도 육지의 어느 항구를 향해 가고 있겠지. 부산이나 목포 아니면 다른 어디든... 세월호가 저 녀석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즐거움 한편에 써늘함이 다가선다.


그 와중에 한라산은 자신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제주에 와서 걷거나 야외에 나가 있으면 몇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든 한라산을 볼 수 있다.  한라산은 언제나 구름을 턱 걸친 재 자신의 맑은 미소를 내보이는 날이 적다. 오늘도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임에도 지 혼자만 정상 부근에 뿌연 구름을 잔뜩 걸치고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징한 녀석... 그래도 갈대와 숲과 한라산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참 놓치기 아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갑지가 넓은 풀밭과 해안선을 향해 쌓아 올린 산성 같은 돌담이 앞길에 턱 하니 나타났다. 환해산성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꽤 길게 해안선을 향해 철책마냥 쌓아 올려 있었다. 아마도 옛적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끝자락에 화북연대라는 봉수대 같은 돌로 쌓은 단을 보니 연결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북연대를 지나니 갑자기 시간에 쫓긴다. 3시까지는 사무실에 가야 하는데 벌써 2시다. 하긴 워낙 늦게 일어나서 걷기를 시작했으니 벌써 2시라는 게 내가 몰두했다기보다는 게으름의 소치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배고 고파왔다. 다행히 배낭에 싸가지 온 롤케이크 두 조각을 베어물었다. 목이 메었다. 벌컥벌컥 물과 함께 급하게 롤케이크를 흡입하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오늘은 여기까지. 돌아가자. 나머지는 다음번을 기약하고 더 이상 걷기를 단념했다. 버스정류장을 찾아 큰 길가로 나섰다. 여전히 제주시내다. 버스를 보니 집 앞에서 타면 여기까지 온다. 한참을 혼자서 미로를 헤맨 기분이다. 올 때 타고 왔던 그 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제주시를 걸었는데 제주시가 아닌 곳에 다녀온 느낌이다.


제주는 그 점에서 낯섦과 새로움을 준다. 이 버스길은 일상생활로 가득 차 있는데 한 블록 안쪽에는 항구와 바닷가와 낭만과 추억을 이야기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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