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섬주섬 서랍장을 열어 수영복과 반팔 셔츠를 꺼낸다. 여름 바다에 나갈 요량이다. 복장의 자유를 누려보려 한다. 복근 자랑은 수술 자국이 남아 있는 꼴을 보일 자신이 없으니 티셔츠로 가린다. 중절모와 선블록 로션도 잊지 않았다. 해 질 녘을 맞아 돗자리와 음료수를 챙기고 해변으로 향한다. 해변은 하루 일과를 마친 이들과 하루 종일 지속된 물놀이를 마친 아이들과 물놀이 기구가 엉켜있다. 그 틈을 벗어나 자리를 잡는다. 평일 저녁을 바닷가에서 보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제주에 사는 특권이기도 하다.
나는 여름철에도 웬만하면 거의 긴팔 셔츠를 입는다. 가끔은 재킷을 입기도 하는 중년이다. 반바지에 맨발과 아쿠아슈즈 그리고 나름 힙한 모자를 쓰고 길거리를 헤매는 변신은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테지만 스스로 쭈삣거리게 하는 점은 어쩔 수 없다.
바닷가로 나가서 즐기는 여유로움 중 최고는 지는 빛에 기대어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책을 뒤척이는 일이다. 괜히 폼 잡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폼 역시 호사 중 하나다. 공교롭게도 책의 주제는 대체로 별로 인기 없는 내용이다. 도시재생, 공동체, 사회혁신, 공공디자인, 커뮤니티 비즈니스 등 많은 이들이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주제다. 바닷가에 누워 물놀이를 하는 가족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관없는 생각을 하면 나름 재미지다.
국회에 빨간 원피스를 입고 등원한 젊은 여성의원이 주목을 받았다. 국회의 품위를 떨어뜨렸느니 관행을 타파했느니 하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그 의원의 입장이나 행태에 대해 동의하지도 관심도 없다. 그런데 그걸 바라보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그게 왜?" 논란거리가 될 일도 아니라는 건데 굳이 그걸 국회품의니 관행 타파니 운운하는 자체가 얼마나 경직된 조직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사자인 의원은 그동안 청바지도 입었고 청셔츠도 입었고 비교적 캐주얼한 복장으로 여러 차례 등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유독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이후 논란이 되고 있다. 원피스를 입으면 정책과 업무에 방해가 되고 검은 양복이나 정장을 입어야만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자격조건이 부여되는가.
국회에 앉아서 알몸사진이나 검색하고 소리나 지르면서 몸싸움을 일삼는 의원들의 행태가 문제지 색이 화려한, 조금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어처구니없는 현 실태가 개탄스럽다. 이전 정부 시절 대통령이 입은 옷의 감각을 찬양하던 언론의 욕지기 나던 보도를 보면서 솟아올랐던 울분의 또다시 생각난다.
옷이 날개라 하지 않았던가. 그 옷만큼이나 생각의 나래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사실 압도적으로 늘어난 초선의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 국회에서 질타를 하고 논란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일은 옷가지가 아니다. 좀 더 혁신적이기를 기대하는 초선들이 기존 정치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는 일을 질타하고 많은 일을 하도록 지적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국회에 들어간 들 기존의 틀과 방법과 생각을 따라 하면 획일화된 전체주의와 무엇이 다를 것이며 어찌 새롭고 혁신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자유롭고 소신 있게 정치를 할 자신이 없거들랑 옷이라도 파격적으로 입고 눈에 튀어보기라도 하던가. 정치의 용렬함이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2020.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