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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연결과 짜증 나는 사회

by 너구리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야 새삼스러울게 전혀 없음에도 언뜻언뜻 다시 깨닫는다. 세상이 그걸 깨닫게 해 준다. 그때마다 짜증이 가라앉질 않는다. 뭐가 그리 짜증이 날까. 누군가 나를 건드리거나 자극하면 폭발하기 직전이다. 나뿐 아닐 테지. 그럴 게다. SNS를 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삶의 변화에 낯설어하며 견디다 못해 스스로 분노 게이지를 높이는 게 보인다. 그럴 때마다 "저러다 곧 폭발하지 싶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간들이 세계화의 늪인지 함정인지 아니면 혜택인지 모르게 세상을 마구마구 돌아다닐 때 세상이 이렇게 연결되어 돌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세계화가 당연한 결과이자 마치 선물인듯. 물품의 교역은 물론 서비스나 인적 교류에 이르기까지 경제개발의 혜택이 조금씩 드러나는 국가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관광에 해외여행의 붐을 타고 물밀듯이 세상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마치 쓰나미 같았고 특히 중국을 위시한 후발 개발도상국들의 파고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투어리피케이션이라는 용어까지 나왔으니. 관광이 지역경제에 선이 아니라 배척해야할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지내고 있는 제주도에서도 중국관광객들이 메뚜기떼처럼 한꺼번에 몰려들더니 온갖가지 포식을 마다하지 않다가는 다시 훅 빠져나가버렸다. 사실 산업적인 후유증도 그렇고 심리적으로도 중국인들이 몰려오는 일이 불편하다 못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만큼 사람들의 떼 지은 이동은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크지 않더라도 간간히 내가 속한 사회의 삶과 경제에 영향을 미치며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제주도는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인들이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인해전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게 하는 좋은 본보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유증뿐 아니라 실패한 해외투자로 인해 곳곳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지만 그들을 다시 받는 일이 좋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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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이 지나고 서서히 일상생활을 되찾는다고 생각했고 올 초까지만 해도 다시 예전처럼 해외로 해외로, 밖으로 밖으로 뛰쳐나갈 궁리만 하던 시간들이었다. 이전의 삶이 지속되리라는 생각에 아무도 의심이 없던 터였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6개월이 지나간다. 화들짝 놀라 바짝 긴장하며 살던 결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우리만이라도 빠르게 코로나 19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모두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6개월간 전례 없이 낯선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활패턴을 무시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예전 생활로의 복귀에 대한 기대는 모두들 매우 컸다.


물론 언택트 사회라는 불가피한 상황을 모두 인식하기는 했지만 삶의 변화가 어떻게 한 순간에 바뀔 수 있으며 사람들의 의식 역시 이전의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새롭게 세팅될 수 있겠는가. 가능하든 아니든 이전의 삶으로 최소한이나마 복귀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구동성이었을 것이다.


6개월이 지나고 8.15를 기점으로 우리 각자의 자그마한 노력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노력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너무나 어이없는 정치와 종교 논리에 의해 과학과 종교의 영역이 뒤엉키고 차마 무어라 말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종교의 기치하에 생각없는 좀비들이 날뛰는 세상. n차감염. 어디서부터 누구에게서 감염됐는지도 모르는 감염자들이 속출하고 하루가 다르게 감염자 숫자가 늘고 있다. 뉴스를 보며 사실이 그렇다고 인지하는 것과 다르다. 숫자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이전의 뉴스와 다른 것은 내 생활의 패턴과 행동거지가 아주 직접적으로 규정되고 규제되어 운신을 제한받게 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짜증나고 괴로운 일이 바로 이거다.


뉴스에 나오는 소식이 그러니 안타깝거나 안됐다가 아니다. 태풍이 오는 소식이 우리 동네를 지나가 쑥대밭을 만들더라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 되고 다시 정상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과 강우를 견디며 뉴스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변화는 생활의 운신이 직접적으로 아주 예상치 못하는 수준까지 강하게 규제할 것임을 알기에 짜증이 난다. 태풍이 분다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이틀은 지낼 수 있다. 다소 답답한 상황이겠지만 태풍 경로를 보면서 언제쯤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다음의 상황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상황은 예측이 되는데 그 파급효과가 내 생활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일파만파로 영향을 미치니 환장할 노릇이다. 답답한 거 다 알지만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늘 의심을 품어야 한다. 저 사람이 혹시 육지에 다녀오지 않았는지, 누구와 접촉하고 나서 내게도 전염을 시키지는 않을 런지, 확진자의 동선에 내가 걸려있지는 않은지, 어느 식당이나 마트에 확진자가 다녀갔는지, 서울을 가야 하는데 혹시라도 내가 잘 모르는 사람과 접촉을 통해 감염되지 않을는지,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또다시 감염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쩌하지, 그렇다면 서울을 가지 말아야 하나, 6개월 전에 예약한 병원 정기검진인데 내 병의 진행과정을 체크하는 일인데 미룰 수도 없는데 어쩌지, 진료를 위해 서울에 머물러야 하는 이틀간 어찌 지내야 하는지, 그때 친구들을 만나도 될는지, 돌아와서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일상생활을 해도 될는지,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다. 그 어떤 생각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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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지도 않는 목사 나부랭이나 신도, 좀비라 불리워 마땅한 생각 없는 집회 참가자를 한없이 욕한들 이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니 분노지수만 높아진다. sns에서는 코로나 19 이후의 변화는 삶에 대해서 적지 않은 글들이 올라온다. 그대로라면 이제 올초까지만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과거의 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삶의 정수라고 느껴지는 것들인 경우 어찌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과 만나고 소통하고 의견을 모으고 하는 일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점점 어려워지고 부질없는 일처럼 치부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기기와의 대면을 통해 제삼자와 만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로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이전하고 있다.


어쩌면 공황장애 걸린 사람이나 일본식 히끼꼬모리가 사회의 주류가 될는지도 모른다. 플라스틱 차단막이 당연한 개별화된 인간의 세상을 꿈꾸는 이미지들을 보면서 내가 이런 세상에 살려고 이토록 많은 시간을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애쓰며 살았단말인가 하는 한탄이 나온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더욱 빨라질 텐데 나는 누구와 소통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정당한 것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사회의 커다란 이슈가 이처럼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 사는 것은 정말로 원치 않던 미래의 디스토피아인데 그 디스토피아에 성큼 다가와 버린 2020년. 인조인간이나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어리석은 대중이 되어버린 내 뇌구조에 대해 스스로 할 말이 없다. 분노조절장애가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잘 달래며 살아가야 할 텐데. 정부의 할 일 혹은 새로운 조직이 할 일중 아주 중요한 일이 주민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부적응을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역시 지금도 혼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생활이라 그런가. 미래의 삶을 살아가는 착각이 드는 밤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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