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모되지 않는 삶을 위하여

열심히라는 이름으로 결국 소모된 내 생활을 반성하며

by 너구리

근년 들어 몸이 많이 안 좋아지고 스스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자주 입 밖으로 낸다. 일을 하는 시간이 줄고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 이외의 변수가 계속해서 생기고 있으니 삶의 풍요나 윤택함을 즐기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되지만 현실의 결과는 아주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내 삶은 소모되고 있지 않은가.


소모라... 그렇다. 분명히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열심히'라는 단어의 본질은 내가 가진 에너지를 소진해서 더 이상 퍼갈 수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니 꽤나 우울해진다. 겨우겨우 솟아나는 샘물을 열심히 퍼서 양동이에 담다 못해 샘물의 양을 늘리기 위해 땅을 밟아 쥐어짜 내는 내 행동을 슬프게 연상한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의 쇠락과 업무질의 악화, 정신건강의 피폐는 스스로가 착각 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몸이 견딜 수 있으니 밤낮을 잊은 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설사 대가가 적더라도 행정이라는 공적구조와 함께 하는 일이기에 공익을 위한다는 착각에 빠져 개미지옥에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문뜩 깨달은 현실의 참상은 사실 참담하기 짝이 없다.


'열심히'라는 단어의 본질은 내가 가진 에너지를 소진해서 더 이상 퍼갈 수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니 꽤나 우울해진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 였던가. 창밖의 나무에 매달린 잎새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면서 병실의 환자는 삶의 의지를 잃어가고 마지막 남은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의 인생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동일시의 상태에 있는 상황. 이를 극복하기 위해 떨어진 잎새 대신 벽에 나뭇잎을 그려 넣어 환자가 다시 삶의 생기를 되찾았다는 뭐 대충 이런 식의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인데 그 마음이 아무리 좋아지려 해도 내 삶의 순간순간을 소모하고 있으면 결코 인생이 나아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서는 제주의 생활은 8년여간 일과 낯선 장소에서의 불합리와 소외감을 타파하기 위한 악착같은 노력의 결과였다는 자부심이 존재했었다. 그렇기에 말도 안 되는 업무의 양과 수많은 번민의 상황을 몸으로 견뎌보려 했고 책임져야 하는 일이 내게 닥치면 아주 잘하려는 욕심에 가득 찼었다. 그 결과는 공교롭게도 온몸이 망가지는 일이었고 가장 흔한 암 발병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 몸에 대해 조심을 해야 했고 나는 과로로 인한 지나친 스트레스라는 아주 평범한 자가진단을 통해 스트레스와 업무를 줄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 삶의 새로운 돌파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제주에서 도시재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이를 통해 나름 내 입지가 아주 조금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기대에 기인하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관련된 일에 매진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베이스를 좀 더 잘 유지하고 후진들을 위한 발전적인 기틀을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능한 한 행정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협력이라는 단어를 온몸에 새기려고 노력했었다. 설사 이를 어떻게 인정하든 나의 의지는 그랬다.


일방적인 과정이 황당한 결과로 나타난다. 나의 노력은 부도덕한 욕심과 탐욕으로 비치고 있고 어떻게든 행정의 책임회피를 위해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자로 전락하고 있다. 나만의 욕심을 위해 탐욕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챙긴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선의가 선의 대신 탐욕으로 바뀌는 시간인 지난해 나는 스트레스와 과다한 자기 혹사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되었다. 암의 상태가 악화되어 호르몬 치료를 다시 시작해야 했고 급기야 일과 주변 환경에 대한 각성으로 평생 한 번도 방문한 적인 없는 정신병원에서 한 달 이상 잠을 못 자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수면제 처방을 받고 억지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더불어 온몸에서 이상증세가 번지기 시작한다. 허리가 너무 아파 운신의 폭이 거의 힘들어진 상황이 되었으며 어깨의 고통으로 팔을 올릴 수 없고 양쪽 다리가 저려 걸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몸에 안고 지내야 했다. 걸음을 빨리 걸을 수 없으며 그로 인해 내 몸의 전반적인 반응은 이미 노인의 경지에 다 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돌이켜 본다. 8년간의 제주생활이 나를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조금이나마 좋은 환경을 만들어 내기 위한 나의 노력은 언제나 어려운 상황을 떠맡는 결과로 결론지어졌다. 결국 조금씩 내 빠와 살은 물론 영혼을 파괴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단순히 스트레스 만빵이나 업무과다의 상황이 아니라 철저히 공적인 활동과 프로젝트를 위해 나를 소모하고 있었던 셈이다. 행정이나 단체나 혹은 주변을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 선택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평온해지면 이 상황을 해프닝으로 회고하듯이 이야기하기를 기대한다. 도시재생의 초기 상황은 이러했다라든가, 암 걸리기 위한 절호의 잔스가 내 주변에 얼마나 도사리고 있었다던가, 프리랜서의 상태라면 나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사업체와 공공 프로젝트에 가서 최선을 다해 작으나마 알량한 경험들을 이용해 주민과 행정의 가교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잘못되게 해석되는지도. 그 와중에 불가피하지 않으면 부르는 곳에는 거절함 없이 참여하려고 했고 그것이 올바른 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들어 이일 저 일을 하게 된 나의 1년여간의 노력이 이전의 위치를 활용한 편법이자 부당이익을 얻은 것이라는 것으로 평가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갑자기 나의 노력이 나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소모되다 못해 이용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의가 선의 대신 탐욕으로 바뀌는 시간인 지난해 나는 스트레스와 과다한 자기 혹사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되었다


순간적이나마 제주를 떠나버릴까. 잠수를 타서 저잣거리에 더 이상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그러나 제주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대신 확실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내가 소모되도록 방치하면 안 되는 일이다. 젊었을 때야 소모돼도 곧바로 샘물이 가득 차기에 소모전이 아니라 열심히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그 당시에는 무댓포로 열심히 일을 하면 됐다. 심지어 새로운 삶의 경험을 습득하면 된다는 것을 대가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노력을 여전히 단순 노동식의 시간적 역할로 평가하고 내가 가진 경험과 노하우 혹은 사안을 해결하고 이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노력은 평가되지 않는다. 물리적인 시간을 그곳에 투여했는가가 여전히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다. 나는 질적인 노력은 사라지고 양적인 노력으로 치환돼 물리적 시간인 하루 8시간을 때웠느냐만 중요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다. 감당해 낼 수 없는 일들이나 컨설팅이나 자문은 하루 8시간을 풀로 채워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는 것이 된다. 프로젝트의 본질과 맞닿아 방향을 찾고 지혜와 네트워크를 이끌어 내는 작업이 내 일의 본질이다. 그것이 단순한 노동력을 투여하는 시간 때우기와 등치 되는 현실에 개탄을 금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 인생의 시간은 여전히 스트레스 가득한 일을 넘어 내 몸의 진액을 빼어내는 작업을 요구한다.


소모되는 것은 생명을 단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의 질을 현격히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알면서도 행정과 관행은 말할 때는 불합리를 동의하다가 본인들이 피해가 되는 순간이 되면 과거 수십 년간의 자료를 활용해서 사람들을 단순노동자로 취급하고 제 역할을 하지 않은 파렴치한으로 몬다. 자신들은 책임이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존엄을 찾고 싶고 내가 하는 일이 정당하게 대가를 받고 평가받기를 원한다. 하루 종일 한자리에 앉아서 사무를 봤다는 근거를 대고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하면서 보조금을 부당 수급한 이중작업을 한 파렴치한으로 평가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이 소모되는 시간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나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 철부지이자 정신 못 차린 인물이었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러기에 내 삶이 소모되지 않는 순간을 이용해 내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내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나를 이유 없이 소모하는 부품으로 활용하는 어리석음이 계속되지 않아야 할 텐데. 인생과 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오늘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어쩔 수 없이 파산 직전의 우주선에서 내용물을 버리듯 시간과 에너지를 쥐어짜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분위기가 그립다.


그런 지역에서 살고 싶다. 그런 지역이 제주도가 아님은 여러모로 보나 확실하다. 참 좋은 환경인데 인간들은 반대인 웃픈 땅이 되어버린 곳.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할 날을 되찾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