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그릇으로 일당백
‘외국 생활’하면 떠오르는 로망 중 하나라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유창한 영어로 어울리며 다양한 문화를 알아가고 나의 세계관을 넓혀 가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외국에 살아도 외국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아이 학교를 오고 가다가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일상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를 넘어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용기, 시간,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영어가 그렇게 유창하지도, 짧은 시간에 붙임성 있게 다가가 사람 사귀는 스타일이 아닌 내향형 인간인 나는 굳이 누군가를 사귀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말 운이 좋게도 좋은 이웃(=미트가이를 소개해 준 그녀, 우리 아이 친구의 엄마)을 만났고, 인도에 온 시기도 비슷하고 아이들이 외동딸인 것도 공통점이 많았던 우리는 가족끼리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그 이웃의 소개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또 다른 이웃을 소개받았고 저녁 식사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꽤 흥미로우면서, 어딘가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 한국 부부: Korea 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주제 ‘North Korea 김 씨’, 그러나 이제 계엄령과 대통령 탄핵으로 화젯거리 추가됨
- 호주 부부: 국적은 호주지만 부부 각각 레바논과 이란 출신, 레바논 전쟁 중, 이란 최근까지 전쟁하는 등 정세 불안
- 러시아 부부: 직업 때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아서 인도가 다섯 번째 주재지 정도 됨, 러시아는 3년째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
친미 성향의 한국은 중동 정세에 대해 많이 아는 바가 없고 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고 이란도 최근까지 전쟁, 러시아 전쟁은 3년째 끝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종교도 다 다르다. 이런 상황의 세 가족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민감한 주제로 얘기할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음식과 문화에 대한 얘기가 적격이다. 각기 다른 문화권에 온 사람이지만, 먹는 즐거움 적은 나라 인도에서는 각 나라의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특히 그날은 호주인 아내가 이란 전통 음식인 양고기 카레와 크런치 라이스, 러시아인 아내는 조지아 음식인 가지 호두 샐러드를 준비해 왔다. 어떤 식당에서도 먹어볼 수 없었던 훌륭한 음식들이었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우리에게 일용할 소고기를 주시는 미트 가이 예찬을 포함, 자연스레 각 나라의 음식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부부가 사할린에서 산 적이 있어서 한식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반갑고 고마워서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니 ‘비빔밥’이라고 한다. 나는 다음번 모임에는 꼭 비빔밥을 준비해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비빔밥을 대체 어떤 모양새로 준비해 가면 좋을지 고민이 됐다.
비빔밥은 원래 각자의 그릇에 밥을 담고 색색의 고명을 올리고 달걀 프라이를 얹어 먹는 음식이다. 정석대로 준비하면 좋겠지만 파트럭 파티라 다른 음식들도 많을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두 가지 정도였다.
1. 개인 밥그릇 준비: 작은 개인 밥그릇에 모든 고명을 올려 준비해 가기. 밥그릇 여섯 개를 들고 아파트 앞동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음.
2. 뷔페식으로 고명 준비: 밥과 고명 따로 준비해서 먹고 싶은 만큼 각자 덜기. 비빔밥이 담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음.
솔직히 두 가지 방법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빔밥은 빛깔 고운 여러 가지 고명이 밥 위에 올라간 그 모습을 보여줘야 의미가 있는데 두 방법 모두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고심 끝에 나는 커다란 양푼에 비빔밥을 준비해 가기로 했다. 모양새는 좀 덜 예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고명이 올려진 모습도 보여 주고, 비벼 먹는 방법과 메뉴 이름의 뜻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비빔밥을 준비해 간 날, 러시아인 부부는 몇 년 만에 먹어보는 비빔밥이라며 흥분했다. 시금치, 오이, 무생채, 당근, 버섯, 달걀지단,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불고기까지, 고명 이름을 하나하나 물어보며 즐거워했다. 호주인 남편은 밥은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고명들 밑에 깔려 있다고 하니 신기해했다. 튜브 고추장을 열어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과 함께 비빔 퍼포먼스를 시연했다. 그리고 밥그릇에 조금씩 서빙했다. Bibimbap의 뜻 설명도 잊지 않았다.
호주인 부부는 비빔밥을 먹어보는 게 처음이었다. 나는 그들이 과연 쿰쿰하고 매운 고추장 맛을 좋아할까 싶어 조금 걱정이 됐다. 그런데 호주인 아내가 밥그릇을 싹싹 비우며 이렇게 말한다.
“This is really nice, it’s really healthy.”
솔직히 말해 비빔밥은 내가 딱히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다. 채소나 나물 먹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아서인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외국인들은 모두 비빔밥을 좋아했다. 왜 그럴까? 러시아인 부부와 호주인 부부를 보니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여러 나라 음식 중에서 채소를 섭취할 수 있는 요리는 샐러드나 피클 정도였다. 그러나 비빔밥은 메인 코스 음식인데도 채소, 밥, 고기를 모두 섭취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야 김치와 나물을 비롯해 채소 먹는 게 습관이지만, 의외로 외국 음식 중에서 채소를 메인으로 하는 요리는 보기 힘들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 재료를 비벼 먹는 음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비벼 먹는 비빔밥, 싸 먹는 김밥 등 대표적인 한국 음식을 보면 과연 ‘빨리’를 외치는 효율성의 민족답다. 한 그릇 안에, 한입 안에 5대 영양소를 모두 갖췄다.
사실 김밥이고 비빔밥이고 준비하기 무척 귀찮은 음식이다. 재료를 종류별로 준비해야 하고 그 재료를 각각 따로 볶거나 부쳐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든든한 음식도 없다. 외국인들이 healthy를 외칠만하다. 보기에도 예쁘다.
여하튼 그날의 비빔밥 메뉴는 성공적이었다. 나 또한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을 소개한 게 게 뿌듯했다. 다음 모임에는 무슨 음식을 준비해 갈까. 모두의 나라는 어지럽지만 좋은 이웃들과의 좋은 시간은 변함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