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도 권태기가 있다고 한다. 나의 여행 권태기는 다행히도 여행을 일주일 남짓 남겨놓은 즈음에 찾아왔다. 매일매일 새로운 곳을 가기 위해 정보를 찾고, 새로운 광경을 보는 건 즐겁긴 했지만 은근히 정신적 체력을 필요로 했다. 몇 개월 동안 해외에서 지내본 기억은 있었지만 여행을 이렇게 오랫동안 한 적은 처음이었다. 벌써 여행을 시작한지 100일이 넘었다. 100일동안 매일 매일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갑작스럽게도 나는 외로워졌다. 메리다는 매일 밤 파티와 공연이 열리는 즐겁고 유쾌한 곳이지만, 매일매일이 흥이 넘치는 활기찬 멕시칸들의 유쾌함 속에서 문득 혼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틀 정도 관광을 쉬고 그냥 메리다를 이 곳 저 곳 걸어다녔다. 예전에는 커피숍을 가도 꼭 로컬 커피숍만 갔었는데 이제는 그냥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시간이 아깝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힘을 내서 여행을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냥 마지막 남은 일주일의 시간을 차분히 마무리하고 싶었다.
오늘은 메리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그냥 보이는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
"Hey, Do you like drawing?"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멕시칸이었다. 그녀 역시 그림도구를 펼쳐놓고 나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Let's draw, together"
그녀가 내 옆자리로 옮겨왔다. 우리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각자의 그림을 그렸다. 한 시간 정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얼추 마무리되고 나서야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독특한 캐릭터를 스케치북에 계속해서 그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림의 마무리가 되었는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는 만화가 겸 캐릭터 디자이너라고 했다. 유명한 사람인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이 되어 TV에서 방영이 되었다며 자랑스럽게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 때문에 메리다에 지난주에 이사 왔다는 그녀는 이 곳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커피숍에 앉아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마침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친구가 되고 싶어서 말을 걸었다고 했다.
아쉽게도 나는 오늘이 메리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며, 일주일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메리다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보여주는 메리다는 네가 가본 곳과 다를꺼야, 라고 말했다. 방금 만난 낯선이었지만 왠지 싫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녀는 멕시코의 젊은이들이 자주 간다는 핫플레이스로 나를 이끌었다. 멕시코의 웅장한 건축양식이 돋보이면서도 매우 감각적인 곳들. 유명한 디자인샵과 박물관, 갤러리들을 함께 관람했다.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메리다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술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술집은 굉장히 구석진 골목에 있었다. 주택가 사이에 홀로 북적이는 작은 가게. 유명한 가게인지 줄이 굉장히 긴 집이었다. 술집 안은 멕시코 현지인들로 가득했다. 외국인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 한시간 정도 웨이팅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나를 본 멕시칸들은 앞다투어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메리다의 가장 오래된 전통 술집을 찾아온 동양인에게 그들의 환대는
대단했다.
멕시코의 전통 술 메스칼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다양한 안주까지,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미처 겪어보지 못했던 온갖 전통 음식들이 우리의 테이블에 올려졌다. 돈 생각하지말고 마음껏 멕시코를 즐기렴- 이라며 바텐더가 말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낯선 이들과 함께 웃고, 마시고, 떠들며 밤을 보냈다. 다 함께 '비바-멕시코'를 외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낯선 장소를 여행하는 나를 걱정하며 숙소까지 안전하게 나를 데려다 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여행 권태기를 떠올렸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역시 멕시코는 사랑스러운 나라야-
낯선 이와 보낸 하루의 시간, 서운하리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