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작은 일에 땀 빼지 마라’는 교훈을 얻은 저녁
뭔가에 홀리기라도 했던 걸까. 왜 나는 갑자기 철판요리를, 그것도 굳이 리조트 안에서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을까. 저렴한 것도, 딱히 엄청 유명한 곳도 아니었는데.
‘오늘은 또 뭐 먹지?’ 고민은 한국을 떠나와서도 여전하다. 타국의 특색 있는 음식을 맛보고 싶고, 바가지 쓰기는 싫고, 때로는 익숙한 맛이 그립기도 한 세 가족의 입맛과 욕구를 모두 충족하는 선택지란 많지 않다. 게다가 아이와 함께하니 위생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좀 지쳤던 것 같기도. 그래서 꽤 괜찮은 선택지를 만났다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들떴던 것 같다. 예전부터 언젠가 한 번쯤 아이에게 철판 요리를 경험시켜 줘야지 싶기도 했었고.
예약 시간까지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서둘러서 바닷가로 나가보기로 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 가족의 취향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산이나 바다냐 하면 무조건 바다지만, 바다는 보는 것 혹은 발 정도 담그는 것까지만 좋아한다는 걸. 오키나와에 갔을 때는 바다까지 1분도 안 걸리는 섬 속의 에어비앤비를 예약했으면서도 결국 바닷가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아이도 나도 조금 아파서 물에 들어갈 상황은 아니었긴 했다. 그렇지만… 오키나와까지 가서 차에서만 바다를 보다니!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예쁘고 좋았지만. 마지막 날 겨우 작은 동굴을 구경하기 위해 살짝 모래밭에 발을 대본 게 다였다. 물놀이를 좋아하지만, 우린 누가 뭐래도 수영장 파다.
그런고로 발리에 와서도 스미냑에서는 발만 살짝 담가본 게 다고, 이곳 레기안에서도 한 번도 바닷가로 나가보질 못했다. 노을로 유명한 꾸따나 짱구는 아니지만 동남아의 멋진 노을을 보고 싶었다. 자꾸만 모래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재촉하며 부지런히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찐한 핑크 노을을 보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예뻤고 즐거운 찰나였다.
결국 예약 시간에 늦어버렸다. 예약할 때 철판을 공유하게 될 수도 있다고 안내받았었는데, 정말 한 노부부가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그분들과 직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담당 요리사의 자기소개에 이어 철판 요리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아이에게 관심을 두고 예뻐라 하는 눈으로 바라봐주셨다. 자연스레 대화하게 되어 이야기해 본 바, 호주의 퍼스에서 온 그분들은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여행 오셨다고 한다. 넓은 호주 땅덩어리에서 퍼스-시드니보다도 퍼스-발리가 가까운 선택지라 자주 오신다고. 아주 부러웠다.
결혼 생활을 40년이나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작은 일에 땀 빼지 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아내 말을 잘 듣는 것,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사실 강한 억양 탓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퍼포먼스가 다소 아쉬웠던 철판 요리가 마무리되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요리사는 아이에게도 아이스크림을 줄 것처럼 어떤 맛을 원하냐고 물었으나, 이후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은 아이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결국 내가 아이가 골랐던 맛을 골라 나눠 먹었다. 이를 본 할머니는 ‘아이 것까지 챙겨줄 만도 한데 되게 야박하다’ 식으로 말씀하셨다.
가뜩이나 셋이서 2인분을 나눠 먹는 게 눈치 보였던 나는 기회를 틈타 여쭤봤다. 외국에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냐고. 이렇게 아이와 나눠 먹기도 하냐고. 그랬더니 당연하다고, 나눠 먹는 게 흔하다고 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아 남겼다며, 이럴 줄 알았으면 둘이 나눠 먹고 아이에게 하나를 양보할걸, 하며 아쉬워하셨다.
발리와 호주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일이 없었는데, 철판 요리 식당이 이런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두 분은 마지막까지도 우리의 안녕을 바라주고, 식당에 팁을 두둑이 남겨두고 쿨하게 떠나셨다. 서로에게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보이는 그 노부부를 보며 나도 남편과의 40주년 결혼기념일을 떠올려 본다. 우리도 그때 함께 해외여행을 다닐까? 그땐 아이는 안 따라오려나?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