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_아베 코보
한 남자가 위기에 빠진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개성을 잃는다. 의미 없다고 치부하던 노동에 익숙해져 꿈꿔 왔던 것들을 점점 등한시하게 되고 마침내 현실에 안주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느끼는 두려움, 자기혐오, 의문, 불안 등의 감정이 독자에게 여실히 전해진다.
"하지만 볼일도 없이 나다녀봐야, 피로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버려!" -87p
아무리 소풍을 동경하는 어린애라도 미아가 된 순간에는 엉엉 우는 법이다. -88p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153p
오랜만에 문장이 좋다고 느껴지는 책이었다. 탁월한 묘사 덕에 읽다 보면 어쩐지 나도 사막에 와 있는 듯 얼굴이 모래로 까끌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남성 화자가 '모래의 여자'를 두고 하는 생각이나 대하는 방식이 여성으로서 다소 거북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꼭 그래야만 했을까?).
남자는 물통의 물을 한입 가득 마셨다. 그러고서 입안 가득 바람을 들이켜자, 투명하게 보였던 그 바람이 입안에서 까끌거렸다. -15p
시간은 뱀의 뱃살처럼, 깊은 주름을 그리며 몇 겹으로 접혀 있었다. 그 하나하나에 들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117p
사고도 판단도 갈증 앞에서는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에 내리는 한 가닥 눈발에 지나지 않았다. 열 잔의 물이 사탕이라면, 한 잔의 물은 차라리 채찍에 가깝다. -149p
아무렴 어떠랴...... 다 죽어가는 판에 개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 -192p
모래마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지만, 그 양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모래기둥 사이사이에 위치한 집에 감금되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산다. 앞으로 닥쳐올 불행이 모래 기둥처럼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실이 더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따라 왠지 더 불안하다. 분명 적과 우방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작전 지도가 뿌연 중간색으로, 수수께끼 그림처럼 정체를 알 수 없게 모호해지고 말았다. -212p
오래전 허지웅의 <나의 친애하는 적>에서 처음 이 책을 접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적어도 발이 쑥쑥 빠지는 모래 구덩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일 만큼은 용기 있었다고.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다시 꺼내볼 때마다 전율한다. 마침내 구덩이 밖으로 나설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다시 들어가 당장의 목적에 만족하고 설레어하는 풍경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선택일까. 더 권할 수 있는 삶일까.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남자를 비웃었다. 지금은 쉽게 판단하지 못하겠다. -112p, <나의 친애하는 적>
동명의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나는 굳이 영화까지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숨 막힐 것 같아서.
‘작가의 서랍’ ‘파먹기’ 중 올리는 예전에 쓴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