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Sep 2019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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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망했어, 다시 태어나고 싶어.' 라며 엉엉 우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할지 몰라 난감했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 또는 해야할 말을 고르느라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어설프게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가 오히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그녀의 상황에 공감하려 노력했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끝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게 실질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음 생에 내가 현재의 자아를 가질 수가 있는가? 내 삶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주어진 삶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매번 주어지는 삶의 과제들을 해결하고, 그로서 얻어지는 최선의 결과를 선택하며, 때로는 희열을 때로는 씁쓸함을 겪으며 그냥 살아가고 있음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렇게 생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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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보내준 동물타입테스트를 하다가 만약 환생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지난 생을 끝내고 다음 생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한 시스템이 있다면 어떨지 문득 상상해보았다. 먼저 지난 생이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아니면 불만족스러웠는지, 만족스러웠다면 어떤 점이 좋았고 불만족스러웠다면 어떤 이유로 별로였는지 등의 기억을 되돌려보는 단계를 거쳐, 다음 생에서는 지난 생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스스로에 대해 성찰해보는 단계를 지나 마침내 다음 생의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다. 다음 생의 형태가 꼭 인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지난 생에서 좋았던 것이 만약 바다였고, 싫었던 것이 수영을 못했던 거라면 다음생은 돌고래를 선택한다든지,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게 좋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숨만 쉬고 싶었다면 무생물 바위나 식물로 태어난다든지. 역시 전생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친구는 만약 전생에 내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고양이가 아니었을까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물을 무서워하니 아마도 물에 빠져죽은 고양이가 아니겠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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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추구하는 인생에는 미래가 있고, 도망치는 인생에는 과거밖에 없다.
- <나는 길들지 않는다> 마루야마 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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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때문인지, 그로 인한 저기압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며 이틀을 그야말로 날렸다. 뒷목이 뻐근하고, 머리 뒷쪽이 무겁고, 후두엽 부근이 마비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일어나 억지로 점심을 챙겨먹었다가, 도리어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더니 지나간 줄 알았던 감기몸살기운이 다시 몸을 순식간에 점령한 듯 으슬거렸다. 비타민D를 섭취 후 친구가 선물로 준 생약 성분의 분홍색 감기약을 입에 후다닥 털어넣고 레몬차와 매실차를 연달아 들이키면서 뜨거운 물을 채워넣은 워터보틀을 껴안고서는 그와중에 잠시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아니 거의 기절했다. 늦은 오후에 다시 깨어나보니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있고, 온 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잠이 덜 깬 머리는 아직도 살짝 무거웠지만 그래도 땀을 흘려서인지 컨디션은 훨씬 나아진듯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누워 천장에 기다랗게 비치는 창문과 창문가에 늘어선 화분들의 푸른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역시 이렇게 아픈 상태는 다시는 겪기 싫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몸이 멀쩡할 때는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머리는 한결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조금 무거워졌다.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고자 겨우 펜을 들어 노트에 몇 자를 끄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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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기록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글로 담아내어 후에 다시 읽었을 때 그때의 순간이 다시 되살아나도록 남기는 것.
생이라는 것은 결국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동시대에 같이 살거나 겪지 않는 이상, 우리는 누군가의 혹은 어떤 존재의 생에 대해서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이 남긴 기록, 또는 그것이 남긴 흔적을 보며 아 이렇게 살았겠거니, 하고 알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읽은 누군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해석 하느냐는 또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
생에서 파생된 기록, 기록에서 파생된 생.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나의 생생한 생을 기록하는 것도 꽤 의미있게 여겨진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 지난 시간들에 대해 애도를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