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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Jun 18. 2024

5월 기록

<월기 프로젝트>

어쩌다보니 6월의 절반이 지나고 쓰는 5월 기록.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약속도 많았고 이벤트도 많았던, 바삐 지나간 5월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좋아진 탓도 있었다. 

곳곳에 비어가든이 열렸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밖에 나와 일광욕을 하기 시작했다. 

베를린이 가장 예쁘고 맑은 계절, 5월. 더운 여름을 맞이하기 전 이 때의 약간의 서늘함과 따뜻한 날씨는 정말 딱 좋아서 누군가 여행온다고 하면 5월이 제일 좋다고 말해주곤 했다. 다른 곳도 비슷하려나?... 


크로이츠베억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베타니엔 내부에 위치한 세 자매 (3 Schwestern) 레스토랑.


바빴지만 다행히도 정신없진 않았다. 나름의 목표한 것들을 어느 정도 매듭짓고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홀가분하게 이 시기를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 많아지면서 스스로 가장 다잡으려고 했던 것이 매일 매일의 루틴이었다. 주변에서는 나보고 의지가 강하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정말 약하고 많이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약한 나를 잡아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려고 노력해왔다. 한국에서는 그것의 일부가 사람들 덕분에 지탱되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에 수반되는 기대감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여기에서는 나 혼자 똑 떨어져있으니 자유로운 동시에 무너지기가 쉬웠다.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잘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언제까지나 반강제로 스스로를 밀어붙이거나, 억지로 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는 과정을 여유롭게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매일 하는 요가코스에서 스스로가 불편한 지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이 머릿 속에 계속 맴돌았다. 턱을 들고 목을 돌리며 주변 근육을 풀어주는 동작이었는데 숨을 쉴 때 고개를 올렸다가 내쉴 때 턱을 다시 내리면서 가장 뻐근한 부분에서 잠시 멈추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멈춰있으면 통증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근육이 풀리고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삶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이다. 힘들 땐 멈춰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러다보면 힘들게 느껴졌던 것이 조금씩 풀리면서 가라앉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 



일조량이 늘어나면서 밤 8시까지도 바깥이 환한 날들이 이어졌다. 방에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늘어나서 기분이 좋다. 요가에 덧붙여 근력운동을 조금씩 시작했는데 그 덕분인지 자고 일어나도 허리가 덜 아프다. 책상 앞에만 장시간 앉아있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혼자 있기엔 크네, 라고 생각되는 방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리하고, 치우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보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유독 길었던 겨울 날씨 탓에 5월이 되어서야 겨울 옷들을 트렁크에 정리해 넣었더니 속이 다 시원했다. 방 크기에 비해 옷장은 좀 작은 것 같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는 1년에 한번씩 대중들에게 하루종일 공연을 무료로 개방하는 행사를 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랜드홀부터 실내악홀, 그외 작은 홀마다 다양한 공연들이 열리는데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조합의 무대들이 많았다. 예전부터 알고만 있다가 직접 간 것은 처음이었는데 아침 첫 공연이 클라라 슈만의 오케스트라 곡이어서 보러가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다가 포츠다머 광장에서 꽈당하고 넘어졌다... 아픈 것보다도 워낙 사람이 많은 광장이라 주변의 시선들이 너무 창피해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필하모닉으로 가는 버스를 탔더랬다. 서두른 덕분에 다행히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공연도 너무 좋았다. 평소의 엄숙한 분위기가 아닌 좀 더 캐주얼한 느낌이었고,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원래 알던 사이인데 같이 협연한 적은 처음이었다며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도 있었다. 흠뻑 빠져 공연을 보고 난 뒤에야 무릎의 욱신거림을 느낄 수 있었는데... 넘어질 때 아스팔트에 스쳤는지 긁힌 상처에 피가 맺혀있었다. 애도 아니고 이게 뭐람... 넘어진 것도 참 오랜만이네 싶어서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다행히 나중에 공연을 보러온 H가 연고와 밴드를 가져와서 붙여주었다. 상처는 이틀만에 아물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픈 오케스트라 (Tag der offenen Tür)


프로그램을 보니 2시에 하프, 플룻, 바이올린 연주회가 있다고 해서 고민하다가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야외 가든에 브랏부어스트 Bratwurst와 맥주를 팔고 있길래 나가봤더니 줄이 너무 길어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보통 구내 식당에서 파는 음식에는 큰 기대가 없는 편인데 한쪽 구석에 파스타 스테이션이 있어서 이탈리아 라구 파스타를 주문했더니 웬걸, 예상 외로 맛있었다. 배가 고팠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소스가 나쁘지 않았다. 순식간에, 심지어 서서 해치운 뒤 실내악장으로 갔다. 일찍 가서 자리를 잡았더니 꽤 앞에 앉아서 볼 수 있었다. 필하모닉의 하프, 플룻, 바이올린 연주자 세 분은 같이 대기실을 쓴지 13년이 넘었는데 어느날 문득 셋이서 공연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나눴고 그 끝에 이번 공연이 성사된 것이라 했다. 연주하는 곡이 프랑스 작곡가 생상스의 곡이라 셋이서 프랑스 국기 색상의 옷을 맞춰입고 나왔다는데 귀여웠다. 어릴 때부터 하프라는 악기에 호기심이 있었고 좋아했었는데, 하프 공연은 흔하지 않아서 이렇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게 운이 좋게 느껴졌다. 만약 내년에도 베를린에 있을 수 있다면, 꼭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5월에는 유독 공연을 많이 봤는데 심지어 다 무료였다. 그만큼 베를린에는 5월에 축제며 행사가 쏟아진다. 

씽씽밴드 SsingSsing 의 이희문 씨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오방신과사방신OBSG4BS 프로젝트 공연을 보았다. 무려 템포드롬 (Tempodrom)의 아레나에서 열렸는데 작년 시규어로스 공연 이후로 이 장소에 온 건 처음이었다. 간만에 그간의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을 만큼 신나고 재미있었다. 타이니데스크에 나온 영상에서 봤었을 때도 그랬지만 실제로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독특하고, 뭐랄까... 가슴을 저미는 한이 느껴지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사일런트 그린 (silent green Kulturquartiers)에서 열렸던 재즈위크. 베를린에서 재즈위크는 처음이었는데 오픈 공연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더랬다. 사실 아무 생각없이 보러왔다가 사회자가 공연 내용을 소개하는데 갑자기 '장구'라고 말해서 뭐지? 하고 어리둥절했다. 공연자 중 한 분이 장구를 연주하는 한국분이었다. 나머지 연주자들도 특이했는데 일반적인 재즈가 아닌 굉장히 실험적인 구성이었다. 보컬의 기괴하게 느껴지는 스캣도 그렇고, 보컬과 트럼펫 연주자가 발목으로 치는 방울소리, 낮은 음역대로 반복되는 베이스, 그리고 장구가 어우러지니 마치 굿이 열린 것 같았고 여기가 베를린인지 한국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원래 화장터였던 사일런트 그린이라는 장소와도 교묘하게 맞아떨어져서인지 곧 있으면 어디선가 뭔가 나오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베를린의 재즈위크에서 오픈일 첫 공연에 한국의 장구가 참여한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뭔가 자랑스러웠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과 함께 일어서서 힘껏 박수갈채를 보냈다. 



오랜만에 프라하에서 지내고 있는 고등학교 후배 J가 연락이 왔다. 베를린에서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으니 시간되면 보러오라며 초대해줘서 얼굴도 볼겸 보러갔다. 그동안 J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을 인스타로만 봐오다가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보러 온 사람들 대부분은 학생인 것 같았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지나가던 시민들도 호기심에 모여들었다. 오후 7시 반에 시작되었는데 어스름이 질 때쯤 끝났다. 같이 간 H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해외생활과 외국어에 대한 애환을 나눴다. (ㅋㅋ)  

다음날 J와 다시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독특한 에너지를 가진 그녀. 거의 1-2년에 한번씩은 연락하고 만날 기회가 생기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날 왠지 비슷한 결을 느꼈다. 그전에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뭔가 이날의 대화가 유독 그랬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이어진 인연이 세월이 흐르면서 각자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나누면서 연결되는 느낌. 대화하면서 새삼 깨달은 건데, J가 내가 대학시절 했던 밴드 공연에도 온 적이 있고(심지어 왔던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나도 J의 개인전들을 계속 갔었어서 뭔가 서로의 호기심 영역이 맞닿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걸 보면 인연이라는 게 있긴 있나보다. 어떤 궤도에서 우연히 만나듯이.



같이 사이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 S와 거나한 브런치를 차려먹었다. 함께 살던 B와 매주 주말마다 해먹었던 브런치를 혼자 살다보니 번거로워져 자주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웠더랬다. 나보다 동생이지만 언니같기도 한 똑부러진 S와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자유'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리고 누군가들은 그것을 아무리 갈망해도 갖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를 계속 림보 상태라고 여기며 답답한 심정이었는데 뒤집어보니 뭐든 시도할 수 있는, 뭐든 될 수 있는 자유 상태인 것이었다. 

이 시간을 아깝게 흘려보내지 말고 맘껏 즐기면서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을 해나가야지, 라고 새삼 생각했다. 이러다 또 잠깐 우울이 오고가고, 또 여유가 왔다가겠지. 뭐 그러면 좀 어때. 여기 사람들이 말하듯 셀라비 (C'est la vie) ㅡ그게 인생이지.  



햄을 노리는 귀여운 마루


요새 주변에 고양이가 많아졌다. S네 마루뿐만 아니라 Y네 오니와 노노, L네 수까지 온통 고양이 집사들이다. 덕분에 임시집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늘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은근히 큰 힐링이다. 따뜻한 아이들의 체온을 느끼면서 보드라운 털을 만지고 있노라면 세상 걱정이 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힐링이 별 건가 싶다. 이래서 다들 반려동물을 들이나보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임시 집사로 만족하기로. 

여기에 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좀 더 잘,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확실하다. 좀 더 현재에 머무르면서, 순간에 흠뻑 빠져들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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