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 이미상
대부분은 그냥 산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부 일들을 불평하면서.
한편 다른 일부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것들 중 슬픈 면면에 대한 무게를 다른 이들보다 더 크게 느끼며
그리고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주어진 슬픔의 무게도
외면하지 못하고 때론 그 무게를 나누어 가지려 하며,
산다.
나와 그에게 찾아온 슬픔은 비합리적인 것이라
더 슬프고 분할지라도
따뜻한 성정으로 인해 결국은 다른 이의 슬픔까지
가끔은 껴안아가며 산다.
무경과 고모는 그런 사람들이었지 않을까.
본인들이 선택하지 않았고
합리적인 이유로 해야하는 일도 아님을 알지만
할 수는 있는 일들을 묵묵히 해가는 사람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을
묵묵히 감내하는 슬픔의 무게를
알아주고 자신이 가끔은 그 무게를 덜어내려
(자신의 일이나 의무가 아님에도, 그러니까 애써 알아줄 필요는 없고 알게돼도 행동으로 대신 감내하지 않고 피해도 되는 일임에도)
기꺼이 움직이는 일.
무경은 고모를 위해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고모와 무경은 그런 것을 해내는 사람이었고 서로가 그런 사람임을 알게됐기에 생긴 유대가 있었을것이다. 그 ‘한 방’이 주는 유대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라는 이유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슬픔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 슬픔에 뛰어들어가본 것에서 오는 유대였을 것이다.
목경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고, 그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본인은 고모에게 그런 사람은 아니었기에
고모와 무경과 같은 유대를 갖진 못했음을
시간이 흘러 깨닫는다.
하지만 고모의 장례식에서
장례식의 크고작은 일들을 본인이 주도하며
가족들중 누구에게도 할 수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을만한 일들을 수행한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들을 했으나
그럼에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던 무경과 고모를 생각하며,
그리고 애써 그런 노력(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는애처로운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카페의 다른 이방인의 삶의 일면을 바라보며.
누군가가 보기에는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바보같아 보이는 일들을 엄숙히 실천해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목경이 가족 모두가 꺼려하는 고모의 장례식을 준비해나가는 것은,
어린 자신을 돌봐준(본인도 어렸을)고모를 위하여,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자신의 책임으로 만들어버린 무책임한 어른들 사이에서
어른들이 할 수 있음에도(정확히 말하면 해야 함에도)하지 않은 일들을 대신하여 해주었던 고모를 위하여,
자신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할 수 있는데 하기싫은“ 일이었을테다.
나또한 할 수 있지만 외면해왔던 것들에 대하여
매 순간 기꺼이 해나갈 순 없더라도 가끔은 용기를 내어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한다.
나와 누군가의 슬픔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