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보라 Sep 08. 2020

비밀번호:가장 소중했던 것이 가장 흔한 것이 되었을 때

모든 이별은 쌍방과실이지만 절대 5대5인 경우는 없다.

지킬 게 많아져 번거로운 일이 많은 세상이다. 예전엔 곳간에만 자물쇠를 채워놓으면 됐는데 이젠 집에 들어올 때도 두 번쯤 비밀번호를 쳐야만 내 집에 들어올 수 있다. 내가 매일 쓰는 휴대폰에도 비밀번호가 걸려있고, 그 휴대폰 안에 메신저 앱을 켜려면 또 다른 비밀번호를 쳐야 한다. 비밀번호도 날로 복잡해져간다. 세 자리면 되었던 자물쇠 비밀번호가 네 자리로, 여섯 자리로, 이제는 대소문자에 특수문자까지 넣어 열 자리쯤 맞춰야 안전하단다. 안전을 위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에서 비밀번호는 내가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각자 비밀번호를 만드는 방법이야 천차만별로 다르겠지만 대부분 기억하기 쉽도록 자신에게 의미 있는 숫자를 쓴다. 내 정보를 지켜줄 소중한 비밀번호이기에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리게 되는가 보다. 기억하기 가장 쉽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나 생년월일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엔 휴대폰 번호나 생년월일은 그놈에 보안상 이유로 사용이 불가해서 대충 아무 번호로 했다가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는 일이 허다해졌다. 그래서 다음 방안은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말하자면 비밀스러운 숫자들이다. 이를테면 당시 남자친구의 생일이나 휴대폰 번호, 남자친구와 사귄 날짜나 둘만이 아는 의미 있는 숫자 같은 것 말이다.


 그 덕분에 비밀번호는 연인 사이에서도 공유하기 전에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려야 하는 비밀스러운 것이 되었다. ‘아직도 전여자친구 생일이네, 잊지 못했나봐.’, ’전남자친구 전역날짜를 비밀번호로 해놨더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닐까?’ 연애상담을 꽤나 해본 사람이면 한 두 번쯤 들어봄 직한 고민일 것이다. 사실 대부분은 기억하기 쉬워서 해놓은 건데 상대방은 그 숫자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곤 한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연인이 헤어질 때마다 비밀번호를 바꾸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전 여자친구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해놓은 그 사람은 그 누구보다 그 여자친구를 깨끗하게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 번호가 전 여자친구의 생일이라는 사실도 상대방이 물어보기 전엔 절대 깨달을 수 없을 확률이 더 높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네 자리 숫자로 전락해버린 내 가장 소중했던 옛사람의 생일.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 정해놓은 이 네 자리 숫자가 이제는 눈감고도 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의미는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이 아이러니는 연애의 구슬픈 끝자락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소중했던 사람을 잊으려고 노력할 때보다, 가장 소중했던 것이 가장 흔한 것이 되었을 때 그 사랑의 힘이 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별 후 가장 서글픈 건 그 사람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마치 내가 원래 없던 사람인 양 잘살고 있는단 말을 들었을 때니까.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더 티가 난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그 사람의 인생이 내가 없이도 순탄하게 흘러갈 때 우리는 이별에 대한 아픔을 넘어 관계에 대한 허무를 느낀다. 


여전히 차트 상위권에 머물러있는 윤종신의 ‘좋니’라는 노래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건, 이별 후 사무치는 슬픔만큼이나 이별 후 잘 지내는 그 사람의 소식에 혼자 억울하고 쿨하지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자괴감의 크기도 못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잘했어 넌 못 참았을 거야. 그 허전함을 견뎌 내기엔’이라는 가사가 그리 찌질하게 들릴 수가 없더라. 다음 연애의 이유가 자신이 없는 허전함을 참지 못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대용품이었다고 자위하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여자친구가 자기 생일을 비밀번호로 해달라고 하면 좀 해주고, 1년에 며칠 안 되는 기념일엔 좀 시간도 비워놓고 말이다.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연애가 끝나고 후회하고 원망하는 건 그 쉽고도 중요한 일을 어렵고 무의미한 일 뒤로 미룬 당신같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좋냐고? 그래 좋지 그럼.



 모든 이별은 쌍방과실이지만 절대 5대5인 경우는 없다. 가장 소중했던 것이 가장 흔한 것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후회하고 누군가는 후련한 것이 연애의 끝이다. 하지만 연애가 끝난 순간, 내가 후회할지, 후련할지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모른다. 아마 그걸 미리 알 수 있다면 미련과 후회라는 단어를 남기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을 테니까.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연애가 끝나지 않았을 때 미련으로 남지 않도록 사랑을 다 써버리는 일이다.

이전 13화 속물근성: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동화 속에만 존재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