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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보라 Sep 08. 2020

다이어리 : 다이어리에도 쓰지 못하는 심정이란

당신의 초라함을 외면하는 순간, 버려지는 건 언제나 당신 자신이다.

다이어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물건 중에 마음과 가장 닮아있는 물건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먹은 음식과 우리가 걸어온 흔적들, 그리고 우리가 담아온 마음과 말들이 적혀있다. 우리의 삶이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설렘과 권태로 버무려져 있듯이 다이어리에도 마찬가지다. 고이 간직하고 싶은 어떤 소중한 기억과 더불어 잊을 수만 있다면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까지 다이어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을 적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 언제나 기록보다 못 미덥기 때문이라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적어두는 것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적는 행위로 감정을 해소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기억도 흘러가는 일상보다는 삶에서 중요한 것이라 여기는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모두 나처럼 작가로 태어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라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내가 느끼는 즐거움보다 고통에 더 몰입하며 살아왔고 또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록해왔으므로. 


 꼭 나처럼 작가적 본능에 의한 기록이 아니더라도 해가 바뀔 때마다 의식처럼 다이어리를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와 비밀을 굳이 다이어리에 적어둔다. 그리고 몰래 훔쳐보진 않았지만 대부분 그런 비밀들은 다이어리 맨 앞장이 아니라 중간, 혹은 맨 뒤에 쓰여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언젠가 무료해서 그간 써놓은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는데 어떤 해의 다이어리에는 몇몇 부분에 종이를 덧댄 자국과 화이트 칠로 범벅된 장이 있었다. 내가 봐도 나 스스로가 너무 못나서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날들의 기록을 나름 가리려고 노력했던 흔적이었다. 덧대고 가려놓은 그 부분에 정확히 어떤 단어와 문장들이 쓰여있는지는 모르지만 꼭 상처 위에 붙인 대일밴드 같았다. 이제와 상처의 모양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흉터를 보니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해, 정확히 그해의 봄은 나에게 가장 지독한 시간이었다. 매일 학교 수업을 듣고 돌아오는 길 내내 참았던 눈물을 현관문을 엶과 동시에 터트리는 날들이 이어졌고, 잠시라도 한가해지면 허튼 생각이 나서 하루를 30분 단위로 쪼개서 살았다. 돈이 궁한 것도 아닌데 아르바이트를 2개씩 뛰고, 수업시간이 끝나면 과사무실 인턴을 하면서 나를 혼자둘 시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더디게라도 시간이 흘러갔고 그 모진 봄이 끝날 것 같았다.  


그해의 봄은 태어나 무엇도 좋아해 본 적 없는 듯한 그에게 사랑 그 비슷한 걸 해보겠다고 덤비던 봄이었고, 이 무모한 도전에 몇 번이고 거절감과 실망감을 맛보아야 했던 봄이었다. 분명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전제하에 시작한 연애였지만 나만 애쓰고 나만 안달이 난 것 같아 마음이 다 닳아 없어질 것같이 아픈, 아직도 눈발이 날리는 그런 봄이었다. 그 날의 기억들은 이제 많이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건 참 나약하고 또 어리석었던 나 자신이다. 사랑 앞에 당돌했던 내가 문자 하나를 보내면서도 그의 눈치를 보았고, 마음은 표현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내가 받아줄 용의가 없는 사람에게 주는 마음은 폭력이라는 자기비하를 밥 먹듯이 했다. 날씨가 유난히 좋아서 슬펐고,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다워 울었다. 그 봄은 그렇게 잔인했다.  


 종이가 울퉁불퉁한 것을 보니 적으며 많이도 울었고,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많은 걸 보니 그만큼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아픔을 부지런히 적어내렸다. 아마도 이 순간들을 적으며 한켠으로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지나고보면 스스로가 대견스러울지도 몰라, 게다가 좋은 글감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아니, 나는 분명 그랬을 거다. 나는 태생이 나의 생을 좀먹고 자라는 작가이므로.  


 이렇게 쓰라리고 아팠던 기억도 부지런히 기록했던 나조차 어디에도 적지 못하는 그런 순간이 있다. 치부와 비밀보다 더 들키고 싶지 않은 건 나의 초라함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라고 해도 단 한 명에게는 아무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싶기 마련이고,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비밀도 사실 들키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고작 이만큼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사실은 내가 이렇게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초라함이 인간의 본디의 모습임에도 우리는 그걸 인정하는 순간 정말 보잘 것 없어지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나의 초라함을 열심히 기록하기로 했다. 소심하고, 처량하고, 때론 치사하고 졸렬한 내 모습도 부지런히 남겨놓기로 했다. 그걸 외면하는 순간 가장 외로워질 사람은 어차피 나이므로, 나는 모든 순간 나를 혼자 두지 않기로 작정했다. 내가 나의 초라함을 외면하지 않을 때, 다이어리에도 적지 못했던 그 순간들이 사실은 삶의 맨얼굴임을 인정할 때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을 거다.  



그러니 당신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초라함을 외면하는 순간, 버려지는 건 언제나 당신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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