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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보라 Sep 08. 2020

미련을 버린다는 것

내게 미련이 남게 만든 당신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작년 겨울 홀로 제주도로 일주일 정도 여행을 떠났다. 3년째 붙잡고 있던 소설을 끝내겠다는 다짐과 6개월째 끌고 있던 모호한 관계를 끊어보겠다는 의지를 갖추고 떠난 여행이었다.


 실은 아직 반도 넘게 남은 소설을 끝낼 자신도,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그 관계를 먼저 놓아버릴 자신도 없었다. 다만 내게 일말의 휴식을 주고 싶었다. 나는 꽤 많이, 오랫동안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제주도에 도착해 그 날은 그대로 숙소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요양 온 환자였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숙소 근처에 있는 예쁜 카페에서 당근 케이크와 따뜻한 라테로 아침을 때웠다. 낯선 주변의 풍경과 그곳에서 들뜬 사람들, 그리고 2월이지만 춥지 않은 날씨에 마음을 빼앗긴 탓에 나는 한동안 소설도, 그리고 그 사람도 떠올리지 않은 채 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이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도무지 분리되지 않는 일상으로부터 동떨어지기 위한 물리적 거리감이랄까.


그리고 그때 내 귀에 들린 목소리에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다시 소설로, 그 관계로 회귀했다는 의미다-


“미련 버려. 차에서 저걸 주워서 계속 들고 다니네, 버려야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뒷자리에 있던 두 살배기 아이의 엄마였다. 아마도 아이가 쓰레기 따위를 주워 버리지 않고 계속 들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말은 애꿎은 나의 귓바퀴에 걸려 계속 윙윙거렸다.


미련을 버린다는 것.


버려야 하는 것을 주워서 계속 들고 다니는 것.

불편하면서, 계속 떨어트리면서도 기어코 손에서 놓지 못하는 그 무언가.


내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 몇 달째 놓지 못하는 어떤 마음이었는데 미련이라는 단어가 꼭 맞았다.

아마 하늘에서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어휴, 저 미련 곰탱이. 저기까지 가서 저러고 있네.’하는 마음에 그 엄마의 입을 빌려 내게 말해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니 아이에게 ‘미련 버려’라는 말을 하는 엄마는 드물지 않나? 생각해보면 그렇다. 겨우 두 살배기 아이가 무엇에 미련이 남는다고 그걸 버리지 않았을까, 그저 좋아서 들고 있었겠지. 아이는 이내 그 물건을 버렸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미련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왜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이 관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자꾸 들어서였다. 


 미련이라는 감정은 어떤 열렬한 감정을 떼어내려다 스티커 접착제처럼 지저분하게 남은 것이지 단순히 호기심으로 잠깐, 가벼운 호감에 취한 것에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러니까 미련이 생기려면 이전에 열렬한 감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감정은 대게 사랑이고 가끔은 정의 구현, 분노 표출, 강렬한 욕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미련이 응축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이미 시작된 것의 미완결성’이다. 아무리 열렬한 감정이라 할지라도 마음껏 다 쏟아냈다면 우리는 미련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이 더 클수록 몇 배쯤 더 후련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독한 투쟁 끝에 얻어낸 승리는 더욱 값지고 행여 패배하더라도 제대로 끝이 난다면 오히려 깨끗이 포기할 수 있지만 지나간 것에 대해 어떤 결말도 없이 침묵해버린다면 우리는 응당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미련이라는 감정은 한 번 발현되기 시작하면 나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무척이나 어렵다. 미련을 버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내게 미련을 갖게끔 만든 상황이 종결될 때까지, 내가 미련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나는 찝찝하게 미련을 손에 들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미련’이라는 감정이 가장 싫다.


무심결에 들은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미련'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이유는 내게 미련을 남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서였다. 내가 제주도까지 낑낑거리며 들고 갔던 이 미련은 나는 정말 열렬한 진심이었고, 우린 분명 무언가 시작했으며, 아무것도 종결된 것이 없었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그에게 따져 물을만한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혹시나 헷갈려 무언가 시작했더라도 제대로 끝내주었다면 내게 이렇게 미련이 남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서울로 돌아가면 그에게 꼭 이야기할 것이라 다짐했다.


내게 미련이 남게 만든 당신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사랑해주고 말고는 분명 당신의 자유이지만 사랑해주지 않을 거라면 미련이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입장정리해줄 의무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마음껏 요구할 것이다.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지금 여기서 한 발을 뗄 때 뒷걸음질 쳐야 하는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물론 ‘ NO’라는 대답을 들어도 괜찮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아픔은 미련보다 더 길지는 않을 것이다. 


제주도에 있는 내내 미련을 단물이 날 때까지 곱씹은 덕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오랫동안 끌어왔던 이 이야기를 비로소 끝낼 수 있었다.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지만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고, 내일 당장 미워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조금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 쏟아냈고, 그에게 힘껏 책임을 물었으며, 서로 입장정리를 말끔하게 마쳤으니까. 


음, 미련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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