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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보라 Sep 08. 2020

상처를 냈으니 치료비는 물어주고 가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을 감히 용납하지 않는 것, 그것도 용기다.

상처받는 건 정말 아프다. 혼자 길을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보다 누군가 뒤에서 밀어서 넘어지는 게 더 아프다. 혼자 걸어가다 넘어지면 쪽팔려서 아픈 것도 잊어버리지만 누군가 밀어서 넘어지면 원망할 구석이 있어 더 서럽게 울게 된다. 마음에 난 상처도 그렇다. 혼자 아픈 건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숨기게 되어 곪기 쉽고, 남이 낸 상처는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더 드러내고 위로받고 싶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티 내지 못하는 짝사랑은 유난히 길고, 맘껏 티 낼 수 있는 연애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애가 짧아진 이유를 곱씹어보니 내가 달라져서 그렇다. 예전엔 누군가 마음에 상처를 내도 따져 묻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 그 사람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괜히 마음에 짐을 주지 말자, 오히려 그 사람도 상처받을지 모르잖아. 이런저런 말들도 상처를 방치해두었고 곪아버린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기기도 했다. 그 흉터들은 다음 연애를 시작하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되거나, 어렵게 시작한 연애에 걸림돌이 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이미 끝나버린 연애에 이제 와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나보다 그 관계를, 상대방을, 우리가 보낸 시간을 더 소중히 여겼던 탓에 연애가 끝난 후 뒤따라 오는 모든 것을 혼자서 책임져야만 했다.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고 내 이름 앞으로 된 보험비도 꼬박꼬박 납부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 배웠는데, 상처를 낸 사람에게는 치료를 요구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몸에 난 상처이든, 마음에 난 상처이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처가 곪지 않도록, 그래서 흉터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었다. 그 뒤로 나는 가벼운 찰과상 정도는 자연치유가 되게 놔두지만. 치료가 필요한 상처는 그냥 두어 곪게 만들지 않는다. 상처보다 흉터가 더 오래간다는 걸 시간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내가 아플 때 걱정하지 않는 그에게 서운해하지도 못했던 내가 이제는 아플 때 달려오지 않는 그에게 헤어짐을 따져 물을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했던 내가 이제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언의 폭력을 참지 않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눈빛을 외면했던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떠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고, 그래도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던 내가 연애에 있어 최소한의 예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렇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내 연애가 짧아진 건, 연애라는 이름으로 나를 함부로 상처 낸 사람들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내가 가벼워서도, 연애가 쉬워져서도 아니다. 이 연애가 끝날 것이 두렵고, 다시 혼자가 되어 맞이할 외로움이 버거워서 상처를 모른 척하고 잘못을 묵인했던 바보짓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기념일 늘리기를 청산하고, 더 상처받기 전에, 흉이 남기 전에 소독하고 밴드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 내 연애가 일찌감치 종결을 맞이한 것은 자기가 상처를 내는 줄도 몰랐던 머저리 같은 그들의 탓이고, 자기가 낸 상처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한 못돼먹은 그들의 탓이며, 조금 예민하고 잘 얹히는 나의 잔병치레를 받아줄 여유조차 없는 채로 연애를 시작한 그들이 문제다. (그리고 이렇게 빈틈없는 자기합리화 역시 마음에 상처를 흉터로 남기고 싶지 않아 터득한 나만의 방법 중 하나다) 



 나에겐 나를 파괴할 권리도 있지만, 나를 보호할 의무도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상처 낸 사람에게 치료비를 요구해도 된다. 과실에 따라 쌍방과실일 수도 있고 나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을 수도 있지만 그냥 덮어두지만 않는다면 상처는 분명 흉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연애에 있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연애는 언제나 행복의 크기만큼 불행을 달고 온다는 것과 그 무엇으로부터든, 그게 사랑이라할지라도 나를 지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을 감히 용납하지 않는 것, 그것도 용기다.  


PS. 그리고 또 하나. 실비보험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 이왕이면 소멸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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