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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Nov 25. 2017

이름을 적고 들어가는 세계

김금희,『조중균의 세계』


자기만의 세계


조중균씨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바깥 세계와 쉽사리 어울리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원고를 볼 때는 귀마개를 한다. 부장은 “삼 년을 있어도 조중균씨는 융화가 안 돼. 문제가 많거든,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하거든.”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조중균씨는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고 식대를 환불받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원고를 교정 볼 필요 없이 그저 빨리 출간해달라는 노교수의 요구에도 우직하게 오랜 시간 교정을 본다. 그 대가가 따가운 시선과 근무 태만이라는 누명일지라도 말이다. 회사 사람들은 나이가 한참 많은 그를 존대하지도 않으며, 외톨이로 만든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세계


미셸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힘, 즉 권력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상’은 절대권력인 다수 혹은 평균에 편승하는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군중으로부터 분리를 체험하면 불안해한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이기 때문에, 다수가 살고 있는 세계에 편승하려는 것이다. 


군중심리학에서도 이에 대한 실험이 행해진 바 있다. 길고 짧은 선을 준비해두고, 무엇이 더 짧으냐고 묻는다. 사실은 실험도우미인 아홉 명의 참가자들이 긴 선을 짧다고 말하면, 진짜 피실험자인 한 사람 역시도 긴 선이 더 짧다고 말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개성과 자유를 억압하며, 개인의 세계를 탄압한다. 푸코는 정상의 기준이 그 시대에 권력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지나간 세계


회사 내에서 단 한 사람, 해란씨만이 조중균씨의 세계를 인정한다. 해란씨는 사람들이 조중균씨를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것도, 훨씬 나이가 많은 그에게 ‘조중균씨’라고 부르는 것도 맨 처음으로 지적했다. 이에 ‘나’는 그가 직급이 없기 때문이라며, “회사란 그런 거야.”라며 일침을 가한다. 조직과 체제에 군말 없이 순응하는 인물이다. 해란씨는 그가 매일 ‘지나간 세계’라는 제목의, 똑같은 시를 쓴다는 사실도 맨 처음으로 알아내고 ‘나’에게 전해준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을 담은 내용의 참여시였다. 조중균씨는 대학생 시절에도 절대권력의 부조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형수씨는 조중균씨를 두고 “이름 때문에 망하고 이름 때문에 산 애”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언가에 동의할 때 이름을 쓴다. 카드결제를 하고 나서, 혹은 계약서에 이름을 쓰는 것은 이 거래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상사가 결재서류에 이름을 쓰는 것은 그 사안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은, 내가 나를 입증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조중균씨는 대학 시절 이름만 쓰면 점수를 준다는 시험에서, 부당함을 느끼고 이름 대신 시를 쓴다. 그것이 해란씨가 발견한 ‘지나간 세계’라는 시였다. 그 대가로 그는 유급당하고 입대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조중균씨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 이미 연봉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식대를 환불받기 위해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는 수첩에 본부장에게 서명을 받는다. 그가 고안해 낸 ‘간단한 인증’이었다. 날이 갈수록 본부장의 사인은 줄어들고, 대신 식당 아주머니들의 사인이 늘어갔다. 식당 아주머니들은 조중균씨에게 자기들 몫의 음식이라도 주려고 했으나, 그가 거절했다.  


조중균씨의 교정 작업은 너무나 느렸다. 각종 역사 관련 사전들까지 동원해가며 매일 야근을 했다. 그러나 노교수는 출간일이 늦어지는 것에 화를 내며 출판사까지 찾아오기에 이른다. “교정 볼 게 뭐가 있느냐. 니들이 한국사에 대해 뭘 아느냐. 건방 떨지 말고 인쇄기나 돌려라.”라고 말하는 노교수는 조중균씨의 행동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조중균씨는 ‘나’에게 ‘확인’하자며 수첩에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을 적고 서명을 하라고 했다. ‘나’는 본부장과 다른 사람이고 싶어, 사인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해란씨가 제가 하겠다며 발벗고 나서며 사인을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름을 적고 들어가는 세계


이름을 적는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이다. 조중균씨가 시험지에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그 시대의 부조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적지 않아도 되는 시험에 대해, 그래서 얻는 점수에 대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가 조중균씨의 수첩에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조중균의 세계’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중균씨와 함께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에 대해 전보다 더 알게 되었지만, 꽤나 융통성 없어 보이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집이 센 그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반면 조중균씨와 각별하게 지내며 그에게 공감하려 애쓰던 해란씨는 ‘조중균의 세계’에 온전히 동의하며 이름을 적어 넣는다. 우리의 세계에 대해 알긴 뭘 아냐는 형수씨의 물음에 울음을 터뜨리던 해란씨는, 그렇게라도 발을 들이밀고 싶었던 것이다. 사인을 하지 않게 된 본부장도, 대신 사인을 해주며 조중균씨의 끼니를 걱정해주던 식당 아주머니들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해란씨를 제치고 정규직으로 전환된 ‘나’는, 조중균씨가 해고된 후에 부당해고 소송을 방지하기 위한 경위서에 서명을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나'와 해란씨가 은유하는 세계


‘나’와 직장 동료이자 경쟁 상대였던 해란씨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대학원도 다녔고 정식 회사에서 경력까지 쌓았으나 해란씨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말 그대로 노동 현장에서 뛰었다. ‘나’는 회사라는 조직에서 살아남는 법을 너무나도 잘 깨우치고 있었으나 해란씨는 그저 매일 아침 사무실을 청소할 정도로 성실하기만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부장은 팩에 든 고기와 주먹고기에 비유한다. 그러고선 “고생한 사람은 그렇게 딱 티가 나. 근데 재발라도 고생해서 재바른 건 매력 없어. 사람을 불편하게 하거든.”이라며 덧붙인다. 이 복선으로 미루어보아도 두 사람 중 회사의 선택을 받는 사람은 ‘나’가 될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나’와 해란씨를 입사 경쟁이라는 소재를 통해 대척점에 놓으며 각각 다른 성격을 부여한다. ‘나’는 현실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사람이고, 해란씨는 다소 천방지축이나 소외된 세계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결과적으로 ‘조중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확장된다. 식대 환불 이야기를 듣고 해란씨는 훌쩍거렸으나, ‘나’는 조중균씨가 가엾다기보다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해란씨라는 인물을 통해 소외된, 비주류의 세계에도 따뜻한 시선을 줄 수는 없느냐고 넌지시 제안하고 있다. 결국 회사가 채용하는 사람은 ‘나’와 같은 사람이지만, 채용되지 않으면 또 어떤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자기의 신념을 지킴으로써 조금 손해 보면 또 어떤가.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지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삶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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