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높고 푸른 사다리』
사랑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소설은 한국에 가톨릭교를 선교하러 온 1세대의 희생과 한국전쟁, 특히 흥남부두 철수 당시의 아픔을 담고 있다. 시대적 아픔과 그 와중에서도 빛났던 사랑. 흥남부두 철수 당시 요한의 할머니는 그 배, 빅토리아메러디스호에 타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스무 살이었고, 만삭의 피난민이었다. 그녀는 높고 푸른 사다리를 붙잡고 배에 올라탔고, 배 안에서 요한의 아버지를 낳았으나 남편을 잃었다. 토마스 수사는 독일에서 한국의 덕원으로 보내져 한국 근대사의 풍파를 겪었다. 북한군에게 핍박당하고 사랑하는 친구 루트비히 신부를 잃은 것이다.
할머니와 토마스 수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담담했다. 할머니는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 고통을 두고, 짧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기에 행복했다고 담담히 말한다. 루트비히 신부는 “저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우리가 더욱 사랑하는 것만이 저들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마스 수사는 그를 잃은 고통 와중에도 그런 그의 뜻을 기억하며 담담히 살아간다.
이번 생에는 모른다
그리고 요한 수사 역시 한순간에 두 친구를 잃는다. 이제 고통은 우리 세대의 몫으로 넘어온 것이다. 할머니와 토마스 수사, 그리고 요한 수사가 고통을 극복하는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조망하게 한다. 소설은 “그러나 우리가 결국 고통이 우리에게 부여한 그 의미를 안다 해도, 시련을 통과하는 동안은 그것을 조망할 수 없고 그래서 결코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는 데 함정은 있었다.”라고 말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삶은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다.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기에,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한다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그땐 그랬지, 하며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고통 받는 순간에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데, 인생은 한 번 뿐이기 때문에 지금 이 고통이 나중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 알 수가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이 닥쳐왔을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공지영 작가는 “대체 왜?”라는 물음과 회의는 고통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하며, “차라리 잘됐다.”라는 생각은 고통을 끝낸다고 말했다. 그때는 이 책을 읽기 전이라 책 이야기를 하는 줄 몰랐는데, 책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덧붙여 작가는 “우리는 고통 속에서 무언가 찾아내기 위해 살아간다. 고통은 성숙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고통을 원망하며 회피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외면하면 상처로 남지만 직면하면 성장하고 완치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고통이 닥쳐왔을 때에, 이것을 신의 형벌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쓴 약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설은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한다”고 말한다.
사랑 없으면 소용 없네
독일 신부들의 사랑으로 요한의 할머니가 사셨고, 요한이 존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이 뉴저지 뉴튼 수도원에서 만난 마리너스 수사 역시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삶이란 놀랍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한국에 손을 내밀었던 독일 수도원의 신부들이 이제는 한국 수도원에 말년을 의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상에 사랑이 필요한가 보다.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네, 아무것도 아니라네.’라는 <사랑의 송가>의 노랫말처럼, 사랑 없이는 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니.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