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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Nov 25. 2017

소외된 우리 세 사람

김승옥,『서울, 1964년 겨울』


자본주의로 인해 소외된 인간


몇해 전 '세 모녀 사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생활고를 감당하지 못한 어머니와 두 딸이 공과금 고지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세 사람의 죽음을 듣고 김승옥의 소설『서울, 1964년 겨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라는 비극은 비단 이번 일뿐만 아니라, 그 후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어쩌면 숙명의 굴레인 듯 비일비재해왔다.


1960년대를 통과할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속성’ 산업화를 단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으나 부작용도 만연했다. 경제발전의 쾌거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교환가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이 되었고 철저히 소외되었다.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해졌으며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선술집의 이름 없는 세 사람


‘나’와 ‘안’은 선술집에서 각자 술을 마시다가 말을 튼다. ‘나’는 아침의 만원된 버스칸에 목적지 없이 탑승하여 무의미하게 사람들을 관찰하며 여자 아랫배의 ‘꿈틀거림’을 갈망하거나, 사소한 것들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다. ‘안’ 역시 밤거리로 나와 무의미한 사물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무언가 비정상적 행동을 하고 있는 둘은, 마치 불안한 당시 사회 속에서 허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본 같다. 김승옥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저 김, 안, 사내라고 서술할 뿐이다. 그들은 어쩌면 수많은 불특정 다수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볼품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익명성만이 남은 사회이다.


‘나’와 ‘안’이 한 잔 더 하려고 자리를 옮길 즈음 한 사내가 같이 가도 되냐며 따라나선다. 사내는 힘이 없어 보여 ‘나’와 ‘안’은 무언가 찝찝함을 느낀다. 사내는 서적 월부판매 외판원이고, 오늘 아내가 병마와 싸우다 죽었고, 시체를 병원에 사천 원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시체조차도 사고 팔 수 있는 물질만능의 사회. 그러나 ‘나’와 ‘안’은 어떠한 마음의 동요도 느끼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한다. 


타인에게 눈길 한 번 줄 여유가 없는 사회. ‘안’은 ‘나’에게 둘이서 나가자는 신호를 주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사내는 아내의 시체 값 사천 원을 오늘 안에 다 써버릴 때까지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셋은 불구경을 하게 되고, 사내는 돈을 돌과 함께 수건으로 싸서 불 속에 던진다. 아내의 시체 값이라고 사내를 옥죄던 돈은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 우리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는 물질은 이토록 허무한 것이었다.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나’와 ‘안’은 사내를 두고 가려고 했으나 사내는 혼자 있기가 무섭다고, 오늘 밤만 같이 지내 달라고 부탁한다. 사내는 여관비를 신세질 수 없다며 월부 책값을 받아야 하는 집에 찾아가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책값을 달라며 소리친다. 사내는 사실 세상을 향해 악을 쓰는 것이었다. 돈이 뭐길래 이토록 사람을 괴롭히냐고, 나 가난해서 아내 시체마저 팔았노라고.


셋은 여관으로 간다. 숙박계에도 거짓 이름을 적어 넣는다. 익명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굳이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 ‘나’는 사내를 배려하여 모두 한 방에 들자고 하지만 ‘안’은 각각 따로 방에 들자고 한다. 타인과 나 사이에 칸막이 하나씩을 두고 들으려 하지 않는, 소통이 단절된 사회의 표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고립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떨어지게 되면 분리 불안(Separate Anxiety)을 느낀다. 사내는 그 두 가지 이유가 공존하는, 부모에게서 떨어진 어린아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겪고, 돈이 전부인 사회에서 돈이 없어 한없이 초라해진 사내는 결국 여관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약을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사내를 발견한 ‘안’은 ‘나’를 깨워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도망친다. 



동행, 일말의 유대


이 작품은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제목처럼 시대를 적나라하게 표상한다.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인간은 소외되고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다는 그 시대의 문제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일지라도, 부조리한 사회의 올가미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개인의 열망을 담아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서서 술을 마시도록 되어 있는 선술집에서 세 사람이 만나 동행하는 것과 ‘내’가 여관에서 사내를 배려하여 한 방에 들자고 화투라도 사서 놀자고 제안하는 것은, 김승옥이 작품에서 일말의 유대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시나 좌절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희망이 절대로 없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김승옥은 박정희 시대에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의 누명을 쓰고 체포된 것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절필선언을 하고, 박정희 대통령이암살당하자 다시 펜을 든다. 그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산업화와 물질만능을 뒤로하고 인간 개인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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