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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일출

두 번째 입국심사와 잠 못 드는 새벽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작정하고 떠났던 여행은 따로 있었다. 더 오래된 이야기다. 더 어리진 않았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철들었을 때인지도 모른다. 이제 막 입사나 퇴사, 여행 같은 단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시절. 그것이 2016년의 첫 번째 미국 여행이다. 계획이랄 게 별로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계속 바뀌었던 뉴욕 한달살기, 그리고 퇴사여행.


너무 아무것도 몰랐다. 미술관에 가도 무엇을 봐야 할지 몰랐고, 이 거대한 공원의 뷰 포인트가 어디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뉴욕의 랜드마크는 알아서 나타나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뉴욕만이 가능한 공간밀집적 세렌디피티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이라는 여행지가 그토록 큰 의미를 가지게 될지 몰랐다. 두 번째 미국 여행은 '다시 와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뉴욕여행의 전후에 새로운 도시를 방문해야지. 가장 가고 싶었던 시카고와 마이애미를 먼저 가봐야지. 뉴욕에서 버스만 타고 휴스턴까지 갈 수 있는지 알아봐야지.



시카고에 도착한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힝공뷰


첫 번째 미국 여행은 계획이 없는데도 계획을 뒤집어버리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다. 댈러스에 늦게 도착해서 바로 환승을 하지 못했고 항공사로부터 1박 2식을 제공받았다. 갑자기 입국심사를 받게 되었지만 어렵지 않았다. 호텔 셔틀을 타야 하는데 이런 경험이 낯설어서 말문이 막혔다. 인천발 비행기에서 같이 내렸을 것 같은 한국인 노부부의 도움을 받았다.


직항을 타고 시카고를 통해 입국하는 여정은 더 훌륭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트럼프 정권이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시카고 국제 공항에서 만난 백인 남성 공무원들이 나를 아시안 꽃뱀으로 보고 있다는 끔찍한 기분을 견뎌야 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입국을 못할 테니까 유체이탈을 시도했다. 원래 사회적 자아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면 본인만 손해인 것. 한국 사람들은 만나자마자 내가 루저라고 실토하기를 바라는 듯한 질문만 하지 않나. 직업 뭐예요? 결혼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이라서가 아니라, 소위 보통 사람들(normal people)의 사고방식에 화가 나기도 했다. 저들이 유색인종 여성을 내려다보는 건 알겠는데, 왜 짐이 이렇게 적냐는 질문은 공손하게 들었어도 황당했을 것이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한 달이 아닌 한 주의 여행도 나는 그 정도의 짐을 꾸렸고, 그에 대해 한국인들은 정말 그게 다예요?라는 반응이다. 압축을 잘해서 그렇지, 가볍지는 않아요. 짐 되는 물건은 수시로 버리는데도 미국에만 가면 캐리어가 부서진다. 왜 그렇겠는가.



밝기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공항철도를 타고 도심의 시카고 루프로 들어오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입국한 해외도시가 서울만큼 복잡한 도쿄였고, 그 자신감으로 혼자 한달살기를 해본 유일한 도시가 역시 서울만큼 복잡한 뉴욕이었다. 깨끗한 뉴욕이라는 시카고쯤이야.


숙소가 있는 시카고 루프에 도착했을 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근처에 '빠네라'가 있어서 끼니 걱정을 안 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업시간이 이미 끝나버렸다. 모르는 곳을 찾아서 들어가기엔 무섭고 피곤했다. 드럭스토어의 물과 쿠키로 허기만 겨우 달래고 잠을 청했다.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고, 이 밤을 어서 보내버리고 싶었다. 추석이었다.


여행 첫날밤이 늘 그렇듯 잠을 설치고 새벽기상을 했다. 아직 아침은 아니지만 곧 아침이 될 하늘의 기운이 방 안에서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선은 정식 외출이 아닌, 전날 놓친 '밥 사냥'을 위해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갔다. 아직 어두웠다.



드디어, 3년만에 재회한 '빠네라'의 샌드위치와 아아


밀레니엄 파크 앞에 있는 '빠네라'의 다른 지점이 오픈하기 전이라 산책을 좀 해야 했다. 건축도시 시카고의 상징이기도 한 '클라우드 게이트' 앞에서 일출을 감상했다. 도시 전체를 반영하는 거대한 구름모양의 거울이자 관문(gate)인, 이 철제 조각상에 비친 일출은 오묘했다.


클라우드 게이트를 5:58AM에 찍은 사진은 밤이었는데 6:07AM에 찍은 사진은 아침이었다. 아직도 해가 '떴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실시간으로 사방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 아침 녘의 한가로움을 즐기다 마침내 빵집에 자리 잡고 빵과 커피를 마주한 시각이 6:23AM이었다. 아주아주 긴 하루의 시작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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