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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아침산책 그리고 버킹엄 분수

시카고 루프, 시카고 극장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가벼운 아침산책이었다. 밀레니엄 파크에서 해가 뜨길 기다리다 커피와 샌드위치로 식사를 했다. 클라우드 게이트, 시카고 루프 고가철로, 시카고 극장의 세로 간판을 바라보며 신나게 걷다가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실외 벽시계가 있는 그 교차로에 멈춰 섰다. 저 뒤에는 시카고 극장이 여전히 보인다. 미시간 호수에서 떠오르고 있는 태양이 건물 사이의 좁은 틈으로 빗살무늬를 내려주는데, 아직 소등 전이라 거리가 영롱하다.


뮤지컬 영화 <시카고>를 보고 알게 된 시카고의 이미지는 역동적인 벌레스크(burlesque)*에 가까웠다. 시카고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첫 번째 미국 여행 이후로 다른 미지의 도시들을 이끌며 호기심을 자극했던 도시. 우연히 보게 된 <다이버전트> 시리즈의 시카고는 미래 도시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그 매력의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곳.


*burlesque: 주로 쇼걸이 등장하는 싸구려 뮤지컬

올 댓 째즈, 시카고


그러나 시카고는 범죄도시도 아니고,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클리셰를 좋아하는 미국 관객들에게 신비하면서도 그럴듯한 공간적 배경을 제시할 뿐이다. 뉴욕보다는 진짜 아프리칸에 가깝거나 적어도 미국 보통의 지역에서 성장한 아프리칸 아메리칸에 가까운 캐릭터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인종 불문하고 도시형 캐릭터가 많은 동부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캐나다에 가깝기 때문일까. 관광객이나 현지인이나 다들 자신의 본질에 좀 더 충실해 보였다.


공항과는 다르게, 지상으로 내려오니 천만다행으로 백인들은 친절했다. 이전에는 댈러스의 무던한 남부 사람들과 뉴욕 주변과 보스턴의, 다소 획일적인 도시인들만 경험해봤다. 시카고의 좁디좁은 도심만으로도 이 거대한 다문화 사회의 진짜 스펙트럼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었다.


시카고 루프는 서울의 2호선 루프 또는 을지로 순환선과 비슷한데, 그 안에 포함되는 범위가 훨씬 좁다. 강남역 주변의 몇 블록을 둘러싸고 4개 반의 노선이 순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강남에 시청이 있고, 강북의 중앙로에 주요 백화점과 전망대와 클럽이 있다. 비유적으로 시카고 루프는 서울시청이 있는 을지로와 종로이고, 시카고 리버노스는 코엑스와 잠실을 아우른다. 도심에 올드타운이 없는 미래도시에 가까운 한편 강변에서 보는 풍경은 미국적인 베니스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서울과 많이 닮은 곳이라 마음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밝아오는 도시의 아침


이제 숙소 제공 조식을 먹고 오늘의 여행을 향해 정식 출근을 해야겠다. 새벽 6시 반에 먹은 샌드위치는 야식이니까, 아침식사는 든든하게 해야지. 이렇게 아침부터 부지런을 떠는 날은 이날 이후로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새벽 기상을 해도 산책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조식을 든든하게 먹으려는 의욕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이른 과각성을 핑계로 커피와 책을 흡입하면서 빨리 소진되려고 할 뿐이다.


최근에, 그래 봐야 1년 전에, 가장 멀리 떠났던 부산에서는 둘째 날 새벽에 조식을 먹고 해변 산책을 했지만 잠은 거의 못 잤기 때문에 낮잠을 잤다. 이제는 해가 바뀌어 잠은 줄었다 해도 밤샘은 할 수 없는 중년이 되었다. 내후년쯤 또 회춘을 할 것이다. 아직 반환점도 아닌데 남은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지.



버킹엄 분수


마지막으로 체력이 황소 같았던, 그날은 아직도 미술관 개장시간이 한참 남았기 때문에 버킹엄 분수에 들렀다. 이때 안 갔으면 세계에서 가장 큰, 로코코 3단 분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분수 앞 눈부신 아침 햇살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물러서고 나서, 10분 뒤 미술관의 대기줄에서 행운의 여신을 만났다. 정문 사진을 서로 찍어주자고 제안한 그녀는,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려고 했던 나에게 '미리 준비한' 핫플과 감각적인 사진까지 선사했다.


그날의 세렌디피티는 다른 행운의 여신들을 종종 만났던 미국의 다른 모든 날보다 독보적이었고, 전무후무했다. 관혼상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과는 아주 많이 멀어져 있기도 하지만 그날처럼, 여행자로 다시 태어나는 날에 비교할 수 있는 인생 이벤트는 많지 않았다. 시카고의 첫 3일이었던 그해 추석 연휴는 그렇게 여행 기념일이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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