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고딕, 미드 영어, 인스타그램
얼떨결에 발을 들여놓았던 뉴욕을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지나가다 들렀던 도시인 뉴욕의 낡은 수직성에 질겁했었다. '대도시의 규칙'이 적용될 거라 안일하게 믿고는, 세계의 심장인 맨해튼, 의 심장에서 끝없는 산책을 했다. 육신과 영혼으로 빨아들인 뉴욕의 정취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 각 잡고 영어를 재개했다. 영어라는 거대 명분을 빌어 <가십걸>을 수없이 보고 뉴욕의 조각들을 수집해나갔다.
그때는 뉴욕의 변두리나 뉴욕에 심취하기 전, 뉴욕보다 더 미국스러운 다른 도시들에서 엿본 '아메리칸 스탠다드'에 묘한 향수를 느꼈다. 그것은 라이프 스타일 건축 게임 <심즈>를 20년 동안 하면서 나 자신이 수없이 컴퓨터로 조립해 온 미국 교외의 단독주택과 그 건축요소였다. 전형적인 교외, 즉 서벌브(suburb, sub-urban area: 주로 경제적 계급에 따라 같은 블록에 모여 살게 되는 교외 주택가)의 하얀 울타리와 잔디밭'으로 완성되는 이층 집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마을을 구성하는 <위기의 주부들>은 <심즈>의 드라마 버전이다. 배경음악도 비슷하다. 원제인 Desperate Housewives와 Sims를 구글링해보니 드라마 엔딩곡과 Sims3의 테마곡에 같은 작곡가가 참여했다고 한다. (최신정보! 예전에는 여기까지 알아내지 못했었다.)
시카고에 가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거기 있는지도 몰랐던 '시카고 미술관'에는 사전 정보가 없어도 알아볼 수 있는 고흐, 모네도 엄청 많고, 뉴욕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도 있다. 그럼에도 이곳의 시그니쳐는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이다. 호퍼의 시그니처가 있어서 서로의 시그니처를 공유하는 상보적 관계이나, 호퍼는 뉴욕을 상징하니까.
아메리칸 스탠다드로 이루어진 건축 게임 <심즈>로 설계한 듯한 가상의 마을, 위스테리아 레인에서 벌어지는 도메스틱 스릴러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의 일부 시즌에는 바로 그 <아메리칸 고딕>을 패러디한 애니메이션이 오프닝으로 들어가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활동기간에도 포함되는 1930년에 등장한 이 그림은 미국 대중문화에서 다양하게 패러디가 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묘하게 끌린다.
시카고에서 <아메리칸 고딕> 실물을 봤을 때는 제목도, 어디서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묘한 향수를 느꼈고 긴장이 해소되며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말 그대로 그 앞에 주저앉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비할 순 없어도 시카고 미술관이 두번째로 큰 미술관이다. 더 오래된 다른 미술관들보다 공간 설계도 잘 되어서 주요 전시관과 복도 곳곳에 벤치가 있었다. 앉아서 쉬기도 하고 인스타그램 헤비유저라면 스토리를 올리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의 '스토리' 기능이 왜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 처음으로 인스타 스토리를 업로드해봤다. 지금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당장 그날부터 여행 내내, 각 잡고 올려야 하는 게시물보다 그냥 막 올려도 24시간 후에 사라지는 스토리를 더 자주 올렸고, 얼마 전까지 주제별 스토리 모음집인 '하이라이트'에 도시별로 박제해두었다. 최근에는 하이라이트를 릴스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순서대로 릴스화 작업을 하면서 '릴스'의 사용법을 익혀나갔다. 하이라이트의 목록에서는 초창기 스토리를 삭제한 상태이다.
뉴욕에 처음 발을 들였던 2016년에 인스타그램으로 '새로운' 온라인 자아를 형성했다면, 시카고를 통해서 미국 일주를 하러 들어간 2019년에는 한동안 흐름에서 도태될 정도로 멀어졌던 그 온라인 자아를 재건했다. 모든 여행이 인스타그램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이 여행을 주도하면서 주객전도가 되었던 시절에는 여행 사이의 공백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팬데믹으로 모두가 여행을 멈추었을 때는 지난 여행 사진을 불러내서 추억 시장을 주도했다.
인스타그램과 맞물려서 여행의 경력을 쌓아온 나는 여행 만학도임에도 한참 여행에 빠져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시류를 타는 느낌이 있었다. 질풍노도라고 규정되는 그 나이에 반항이나 방황을 크게는 하지 않고 남몰래 능력주의에 심취해서 스스로를 쥐어짰다. 이제는 키덜트라 불리는 그 나이도 훌쩍 넘어 남들은 정착, 주로 육아로 바쁜 시기에 방황, 아니 방랑을 시작했다. 하기 싫은 정착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가능했다. 지금은 어쩐 일인지 40대 이상이 인스타를 하고, 젊은이들은 블로그를 하는 것 같다. 또한 여행사진 전문가라도 기존 인플루언서가 아니라면 사진만으로는 크게 어필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관심을 받으려는 유저들은 포화상태이고, 관심을 줄 수 있는 평범한 유저들은 관심을 어디에 줄지 심사숙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영어를 재개하고 그 추진력으로 두 번째 미국 한 달 살기를 하고 나서 안타깝게도 팬데믹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터졌다. 고립의 시간을 활용해 더욱 영어공부에 박차를 가했고, 누적된 포텐이 터져서 원서 읽기 콘텐츠 생산을 시작했다. 팬데믹 2년 차에 여행에 대한 희망이 안갯속으로 잠겨버렸지만 인스타그램 랜선여행, 영어 콘텐츠 생산을 계속하다가 블로그에도 미국 드라마부터 미국 대학원 수능인 GRE 레벨의 단어장까지 아카이빙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블로그를 너무 열심히 해서 번아웃이 왔고 분량제한이 있는 인스타라도 1일 1포스팅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독서에 집중하기로 했다.
블로그만의 썰 푸는 재미도 있지만, 인스타의 제한된 분량을 활용해 '지치지 않고 오래가는' 듀라셀 모드를 정착시켰다. 한 시간 이상 캡션을 쓰고 앉아있으면 인스타 어플에 '니 캡션 too long'이라는 조그만 팝업 메시지가 뜬다. 나는 이것을 '퇴근하세요'라고 읽는다. 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싶은 콘텐츠는 나만의 듀얼 인스타그램 플래너인 아이폰 메모장과 블로그 다이어리로 계획한다. 아이폰 메모장에는 날짜별로 3-4개월의 포스팅 주제가 잡혀있고, 독서 속도에 따라 책의 순서는 계속 바뀌기 때문에 블로그 다이어리에는 한 달 단위로 기재한다. 포스팅이 밀리거나, 완독일을 못 맞추면 다이소 무지 견출지를 쓴다. 한참 공부하던 시절에는 마음에 드는 4개월 스터디 플래너를 발견해서 3년 치를 모아두었는데, 이제 다 쓰고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하고 있다.
죽어가는 여행 계정을 부활시킨 시카고와의 역사도 이제 3년이나 되었다. 평생의 과제였던 영어는 뉴욕에서 깨어나 시카고에서 탄력을 받은 후, 팬데믹을 딛고 날아올랐다. 우리는 추상적인 개념을 새처럼 표현하는데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아주 길고 긴 계단에서 3년쯤 버티다 보면 다음 단계로 바뀌어 있는 그런 지루한 과정이다. 오랫동안 버티는 인내심은 필수, 어디까지 올라갈지 레벨업은 선택.
공부라는 것은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왜 진작 이렇게 못했을까, 하는 후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돌아가도 나는 공부하는 청춘은 아닐 테니. 또한 그렇기에 중년이라서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