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미드 <설국열차>
영화로 본 <설국열차>에도 흠뻑 빠졌던 기억이 난다. 벌써 10년 전, 아직 디스토피아를 잘 몰랐고 미드와 친하지 않았다.
가끔 랜덤으로 영화나 보는 정도였고, 미묘한 시차로 인해 약간의 공백을 가졌던 시간들. 춤과 사극과 스릴러 소설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재료 삼아 제4의 창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설국열차>가 개봉했던 2013년 무렵에는 장편소설을 쓰다가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 2년이 흘렀고, 영재 수학 교재를 집필하고 있었기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어려운 책과 영화를 보지 않고 극히 내 취향인 쾌락 독서와 쾌락 드라마 시청을 했다. 춤출 시간이 부족한 만큼 쾌락이 부족했기에.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쾌락이 많이 필요했기에.
아, 그리고 사람들은 영어와 관련한 작업들을 부탁했지만-영재 교육 분야에 남아있기로 한 이유도 해외지사를 맡기 위해서였다-정작 나는 영어 읽기에 컴플렉스가 있었다. 말하기 말고 읽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국에서 영어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코로나 덕분에 눈트임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생존영어만 베테랑이고 책은 겨우 읽었다.
한국인이 만든 미국 드라마 <설국열차>를 이유 없이 미루고 미루다 2023년 첫 3일을 바쳤다. 직전에 뉴욕 드라마 <볼드타입>을 보고 여운을 달래려고 무심코 시작한 이 작품은 영화 버전과 같은 설정, 다른 스케일로 시선 강탈을 했다.
우선 대표 엔지니어이자 급사장인 멜라니의 이중, 아니 삼중생활이 스릴러 지수를 확 끌어올렸다. 작정하고 미장센을 만든 진주의 수족관 나체 수영은 말할 것도 없고, 1등칸 사이코패스를 추적하는 꼬리칸 형사라니.
내 취향이라는 뜻이다. 이 사이에서 베스 틸이라는 제복 경찰은 모두의 딜레마를 한 몸에 겪고 있었다. 철저한 계급사회인 <설국열차>가 다행히 여성이나 퀴어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주는 것 같진 않았다. 물론 오드리나 멜라니, 자라의 경우를 보면 특히 이성애자 여성은 여성성과 모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세계관이긴 하다. 그리고 상류층과 평민, 불가촉천민 사이에 낀 베스에게 업혀있는 피곤한 곰, 피곰이가 관객의 눈에는 보였을 것이다.
설국열차는 시카고 역에서 출발해 전 세계로 연결된 철로를 7년째 달리고 있었다. 시카고 공항에서 입국해 뫼비우스의 띠처럼 8자 모양으로 미국 여행을 했던 4년 전을 반복해서 회상하던 코로나 시절을 박제한 디스토피아 같았다. 처음에는 멜라니가 윌포드를 시카고에 버리고 온 설정으로 시작했으나, 그 후의 소식을 알 수 없으니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었다. 우리가 탑승한 <설국열차>의 설계자이자 뒤늦게 나타난 악당 윌포드에 의해 미스 오드리의 과거가 드러난다. 나이트라이프를 관장하는 나이트카의 예술가이자 심리치료사인 오드리는 3등칸의 정신적 지주.
그러나 윌포드에게 시달리던 기억이 봉인해제되고 스톡홀름 증후군에 시달리다 정신줄을 놓아서 모두를 위기에 빠뜨린다.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쯤 어느 정도 민주화된 열차의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는데...
시즌 3의 마지막, 그러니까 현존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진주인공이 베스구나, 싶다. 난 오드리가 더 좋지만. 농수산물칸, 즉 식량 담당이자 베스의 전여친이기도 했던 우리 진주 언니는 대체 언제 어떻게 왜 사라진 거냐고 묻고 싶다.
진주 성(=성진주) 역의 수잔 박은 예상대로 한국계 배우였다. 그녀가 얼굴 없는 해커로 등장했으나 얼굴이 공개, 아니 해킹 돼버린 <리벤지>에서는 실명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예상했다. 극 중 뉴욕 최고의 해커 놀런 로스(가브리엘 만)도 긴장시켰던 라이벌 팰컨, 이 바로 수잔 박이었다.
마피아 같은 닉네임인, 팰컨(falcon: '매'의 눈, 할 때 '매')이라는 해커의 정체가 미키마우스를 닮은 한국 계 여성이라 놀런도 놀랐다. 놀런은 이런 반전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캐릭터라 특히 매력적이다. (그 콩깍지가 참 오래간다. 인생 콩깍지. 콩깍지, 해봐.) 깔끔하게 치고 빠진 팰컨과 달리 <설국열차>의 진주는 베스와 헤어진 뒤 감감무소식이다. 그러기엔 비중이 크지 않았나? 그리고 베스는 새 출발을 한다.
<설국열차> 승객과 직원 모두가 새 출발을 한다. 멜라니 모녀는 서로에 대한 감정보다 스스로의 신념과 엔진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한다. 이제는 장성한 마일스와 아직 귀여운 위니펙, 새로 태어난 아기 등 어린 생명을 통해 미래를 보여주는 방식도 영화 버전과 닮아있다. 요즘 어린이들을 보면 자꾸 심쿵해서 이에 대한 반박글을 쓰기가 힘들다.
이 작품들의 원작은 프랑스의 만화인데 이 만화의 뒷부분에 영화 버전이 반영된다. 드라마 버전에는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시너지가 반영된다. 완성도 높은 객차와 칼각잡은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은 미드인 듯 미드 아닌, 그런데 한드도 아닌 저세상 포스를 가졌다. 자고로 미드라면 <가십걸>처럼 교복을 제멋대로 입어주는 것 아니겠냐며.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3년 뒤에 첫 미국 여행을 다녀와서 영어 리부트를 하려고 OTT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헝거게임>을 봤다. 이 세계관과 특히 빈민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바람잡이의 의상을 보고 기시감을 느꼈는데, 실제 개봉일은 <헝거게임>이 1년 정도 앞선다.
시대적 분위기나 원작, 레퍼런스 등의 유사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봉 후 5년쯤 지나고 봤을 때도 충격적이었던 <헝거게임> 역시 지금은 더욱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의 레퍼런스로 유용하게 존재하고 있다. 한편 너무도 한국인 남성 위주의 시점이 느껴지는 <오징어게임>은 그 출생 연도가 호적보다 앞선다 해도, 훨씬 오래전에 월드 클래스 여전사를 배출한 <헝거게임>에 비할 수 없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 <언커플드> 등으로 매번 내게 욕을 먹으면서도 다작하는 <섹스 앤 더 시티> 크리에이터 대런 스타의 <영거>에서, 힐러리 더프가 맡은 캘시라는 캐릭터는 밀레니얼 세대를 '캣니스 에버딘 세대'라고도 변주했다.
그러니까, 우리 디지털 1세대들이기도 한 힐러리와 나는 <헝거게임> 세대다. 어쩌면 한국에서 이 영화가 망했기 때문에 여성주의도 망한 것일지 모른다. 수많은 국내영화를 찌그러뜨린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조차 남성취향을 타서. 월드스타가 될 수도 있는 강동원을 더 멋지게 활용하지 못해서.
봉준호, 특히 박찬욱의 영화를 좋아하고 이들이 세계를 접수하리라는 것을 18년 전부터 예상했다. 이미 현실이 된 것을 예상했다는 말은 허언증 같지만 싸이월드에 증거가 있고, 그 증거를 인스타그램 스토리 하이라이트로 박제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월드 트렌드를 주도하는 엘리트 남성 감독들조차 한국 영화판과 한국 관객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장 <기생충>만 봐도 한국 남성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송강호가 영웅이었어야 했는데 아니거든.
<헝거게임>의 후예들은 미래의 계급사회라는 까다로운 설정을 가급적 날카롭게 변주하고 있다. 곧 공개될 <설국열차>의 다음 시즌도 좀 더 날카로워질 필요가 있다. -시즌 1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