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런던스케치>
런던은 마치 위대한 극장 같다. 당신은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응시할 수도 있다. 나는 때때로 그렇게 했다. 당신은 카페나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 바라볼 수도 있다. 언제나 놀랄 만한 또는 재미있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184p, 폭풍우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는 표제작이 없는 단편집, 즉 전체를 포괄하는 소재가 런던 그 자체인 책이다. 도리스 레싱이라는 도장에 입문하기 좋은. 여전히 변화무쌍했던 20세기 말의 런던 풍경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스케치. 활자를 읽고 있는데 눈에서 총천연색의 그림이 자라난다. 햇빛이 귀하다는 런던에서 빛이 들고 나는 순간, 빛을 머금은 구름이 지나가는 순간을 시인처럼 달콤하게 잡아내는 짧은 소설들.
그러나 그 안에서 짐승과 인간은 서열이 불분명한 채 서로를 염탐하고 골탕먹인다. 각각의 작품이 완결된 열린 결말을 보유하고, 대체로 표준화된 단편보다 짧은 크로키였지만 일부는 단편보다 길고 노벨라보다 짧은 정밀묘사였다. 사심없이 읽어낼 수 없었던 '지하철을 변호하며'와 유색인종이라면 보다 냉정하고 엄격하게 읽을 것을 권장하는 '흙구덩이'와 본격 이혼 스릴러...는 아니지만 이혼 육아의 현실적인 이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아주 영국적인 동시에 아주 세계적인 '진실'이 그러하다.
원래 이 책과 매칭하려던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나왔다. 도리스 레싱은 2년 전 내게 김초엽의 맛을 선물한 친구가 올해 생일(7개월 전)에 보내준 선물이었고, 이번에도 그녀의 조준은 꽤 정확했다. 유럽 여행에 대한 기대는 왠지 조금 식었지만 단편과 산책에 미쳐있는 이 타이밍까지 밀려내려온 것을 보면 바로 읽지 못한 것이 더 행운이랄까.
아, 아기 사슴 좀 봐! 그러나 아기 사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충동에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미친 듯이 들판을 달리는 것이다.
-65p, 공원의 즐거움
지금 나는 정원 안에 있는 길에 서 있다. 길 안의 정원이기도 하다. 꽃집 주인이 화분들을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바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화초들은 희망에 차서 솟아오르고 있다. -114p, 지하철을 변호하며
그 당시 사람들은 미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지금보다 상상력이 풍부했었나? -129p, 지하철을 변호하며
쟁반이 지나가면 술잔은 바뀌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대화에 관한 논평과도 같은 이 작은 각각의 춤 속에 또 다른 이들이 끼어든다. -193p, 그 여자
상관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위대한 기적 같은 해방이었다. -202p, 흙구덩이
새처럼 자유롭게 출발하리라......아니, 그 말은 틀렸다. 새들은 인간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조직과 힘에 복종해야 한다.
-211p, 흙구덩이
그러나 그 말들은 '그 모든 것' 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접할 필요가 없는, 접할 수 없는 공포를 뜻했다. -232p, 흙구덩이
그 세 사람은 실제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아주 매력적인 공연이었다고 그 남자는 인정할 태세였다.
-247p, 늙은 여자 둘과 젊은 여자 하나
어른들은 모두 코니와 제인이 비판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인정했다. 그 비난은 그 애들 공통의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 나이 또래가 갖는 오만한 결벽성으로 정제된 것들이었다. -284p, 진실
개인의 사랑과 불안, 소망과 좌절이 색색의 실로 촘촘하게 교직되어 역사와 시대, 시간의 무늬와 흔적을 암시 또는 완성하는 것이다. -306p, 옮긴이의 말
레싱만이 가능했던 적절한 거리에서의 관찰과 냉소인 듯 다정한 '지구'애적 시선, 그 모든 것이 욕심났다. 비록 돌아가신지 십 년이나 되었지만 그녀와 동시대를 살아서 영광이었다. 레싱은 우리가 첫 번째 학사학위를 취득한 해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림처럼 영화처럼 풍경을 보여주고 매작과처럼 꼬여있는 인간의 마음을 관찰자 시점만으로 충분히 전달하는 표현력에 감탄하는 시간들이 소중했다. 더 아껴읽자니 더 미룰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내년 가을 런던에 다녀와서 다시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