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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Dec 01. 2023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는 곳에 도달하는 것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노예제의 논리에 따르는 특수한 상황에서, 친권 행사는 범죄였다. -451p, 작가의 말




흑인 여성 작가의 걸작을 읽는다는 것은 의식적 노력과 처절함에 맞설 각오가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작년 말, 나만의 필독서 리스트를 만들었고 열정적 책 수집과 지인의 선물로 책탑 칸막이 독서실을 만들었음에도, 늘 그렇듯 계획과 실행의 어긋남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내 작가 봉쇄령(?)을 해제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소설을 본격적으로 읽는 동안 원서는 물론 번역서도 눈 앞에서 투명해졌다. 비영어권 작가들을 채워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확보한 책을 끝내 읽어낼 결심을 또 해야 했다.


미국 노예제도가 등장하는 <엉클 톰스 캐빈>과 <워터 댄서>를 읽었지만 결정적으로 두 작품 모두 '흑인여성'이 쓰지 않았다. 버나딘 에바리스토 작가는 아프리카계 영국 여성(과 퀴어)의 삶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었으나 그 작품은 소처럼 잡혀서 노예선에 끌려갔던 이들의 역사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물론 충분히 아름답고도 처절하다.) 토니 모리슨 역시 제도보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사람이 사랑을 할 권리, 그러나 그 주장이 원천적으로 불가한 상황에 대해. 그것도 거의 모든 작가를 넘어서는 가장 탁월한 언어로. 이런 걸작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모두를 작아지게 하는 토니 모리슨을 이제야 만났다는 것이 (늘 그렇듯) 조금은 억울하지만 이제라도 만난 것 또한 특권이라며 어서 이 특권이 더 멀리 퍼지기를 갈망한다.




​그들의 동정 어린 목소리와 그것이 거짓임을 폭로하는 혐오에 찬 눈빛. -28p


그것은 덴버가 외로움에 지쳐,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었다. 덴버는 살아 있는 녹색 벽에 감싸여 보호를 받고 있노라면 성숙하고 맑아진 느낌이 들었고, 구원은 그렇게 소망만큼이나 쉬운 것이었다. -55p


그가 알기로는 그저 조금만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모든 걸, 그저 조금씩만.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대상의 허리를 부러뜨리거나 포대에 처넣는다 해도, 그다음을 위한 사랑이 조금은 남아 있을 테니까.

-81p


두근거리는 가슴, 꿈결 같은 기분, 친구, 아슬아슬함, 아름다움, 덴버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침을 두 번 삼키고 나서, 평생 들어온 이야기를 실 삼아 빌러비드를 낚을 그물을 짜기 시작했다. -130p


어떻게 그만두게 할지, 계속 입을 맞추는 저 입술의 감촉이나 표정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164p


그녀는 핼리가 살아 있다는 소식보다 죽었다는 소식에 더 철저하게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마지막 남은 자식. 그가 태어났을 떄, 베이비 석스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230p


​그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는-욕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곳에 도달하는 것, 그래, 그게 바로 자유였다. -268p


그녀를 딱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려고 근처를 기웃거리는 누군가가 있었다면(폴 디를 포함해), 이 여자가, 자기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고물처럼 버려진 여자가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 위로 신나게 미끄러져내려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285p


​그들은 멋진 거짓말 속에 고립되어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핼리와 베이비 석스가 스위트홈으로 오기 전에 겪은 삶을 단순히 불운이라고 치부했다. 식소의 어두운 이야기들을 무시하거나 웃어넘겼다. -362p


자기 자신이 해결책인 동시에 문젯거리가 되는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418p


​노예 상태를 개인적 경험으로 표현하려면, 언어는 길을 벗어나야만 한다. -454p, 작가의 말




<빌러비드> 내가 갖고 읽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유일무이한 책인 동시에 적어도 올해까지 누적된 나의 최애 분야인 '장편소설'에서 단숨에 인생책으로 등극한 작품이다. 스며드는 고딕호러와 감탄을 거듭하게되는 문장력만으로도 이미 모든 것을 만족했다.  말이 필요 없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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