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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12. 2024

함께 모이는 것은 달 때문이 아니지

치누아 아체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그의 삶은 하나의 큰 열정, 즉 부족의 촌장이 되는 것에 사로잡혀 왔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용수철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거의 다가와 있었다. -155p




언어가 발달한 이보족 마을과 미션스쿨을 거친 나이지리아 작가 치누아 아체베는 자민족의 근현대사를 문학으로 결정화(crystallization)하여 영문학과 세계문학사에  획을 긋는다. 대표작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아체베의  소설이고, 그의 아프리카 시리즈를 시작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런 교과서적인 소개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경험-나이지리아 남성과의 대화(헌팅?) 또는 같은 대륙을 공유한다는 점은 제외하면 연관이 없는 아프리카 남부 여행- 선입견 없이 작품을 바라보는   도움이 되지 않을  같아 훗날로 미룬다.


책의 존재와 위상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이지리아 여성작가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를 읽고도 거의 2년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아체베를 읽어볼  있었다. 동시에, 여러 국가의 다양한 작품을, 빠르게 흡수할  있다면 좋겠지만 통찰의 깊이에 보다 신경쓰고 싶은 지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니까. 마음 깊이 읽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타이밍의 보상은 적어도  시점에선 최적인  하다. 마침 영화 못보는 (?) 도움이 될까 하여 천천히 재주행 해본 <하울의 움직이는 > 신년에 읽어둔 <김약국의 딸들>에서 반복되는 토속신앙의 요소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다> 겹쳐 보이는 경험을 했다. (현재 시점에서 <파묘>까지?) 졸린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되는 지혜로운 속담과 까다로운 생활양식은 한마디로,


사피엔스가 왜 사피엔스인지 보여주는 작품.




산 자의 땅은 돌아가신 선조들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 영역은 서로 오갔으며, 축제 때와 나이 많은 남자가 죽었을 때는 특히 그랬다. 이런 이들이 선조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자의 일생은 자신의 조상에 점점 가까이 가는 일련의 통과의례였다. -147p


​오리 새끼를 돌려주어야겠다. 그런 침묵 뒤엔 불길한 뭔가가 있지. -166p


찬송이 그의 목마른 영혼에 쏟아지자 마음 깊숙이 어떤 위안을 느꼈다. 찬송의 노랫말은 헐떡이는 대지의 메마른 입술에 언 빗방울이 떨어져 녹는 것 같았다. -174p


​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자, 동감이나 하는 듯 장작도 연기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오콩코의 눈이 열리더니, 그는 세상사를 선명히 알게 되었다. 불은 타오른 후 식어, 무기력한 재를 낳는 것이다. 그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81p


달빛 내리는 마을에 자리를 잡고 함께 모이는 것은 달 때문이 아니지. 달은 누구나 자기 집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 -196p




세계사에 대한 거대한 통찰은 없다. 그저 식민지와 본국의 잔인하고도 미묘한 관계들, 다른 식민지를 겪은 20세기 한반도에서 태어나 숨쉬듯이 보고 들은 문화적 유전자에 새겨진 클리셰를 지구 반대편의 가장 오래된 증언들에서 또한번 발견한다. 뱃속이 쓰라리지만 한편으로는 기록되었다는 안도감, 기록하겠다는 숨죽인 다짐으로 차오른다.


​문학계의 <사피엔스>같은 작품이다. 그와 같이 재미와 가독성까지 갖추었으니 (물론 읽고 싶을 때 읽어야 효능감이 극대화되겠지만) 가능한 가장 젊은 날 (이왕이면 두번 더)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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