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내 다리에는 떠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이런 욕망을 이용해야만 해요. -599p, 에필로그
그럼 아버지가 우리한테서 앗아간 세월은 누가 돌려주죠? 내가 가진 건 한 번뿐인 인생이에요. -178p
해안의 금빛 모래 저편에서, 진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진짜 채찍으로 때리고 있었다. -346p
프롤로그만 어지간한 중편소설, 130페이지(심지어 판형도 크다!)인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두 번째 시도만에 완독했다. [삼국지]와 [심시티]와 [대항해시대]를 플레이하는 것처럼 흥미로운 본문은 600년을 훌쩍 넘는 전지구적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사건의 나열이 아닌 인물 중심의 스토리였다.
액자 밖 레진이라는 여주에 의해 발견된 조금 이상한 남주 레몽 포스카는 '불멸'이라는 저주에 걸린 자다. '뭐야, 어떤 인간은 안 죽는데?'라는 생각이 들지만('모든 인간은 죽는다'의 역은 '어떤 인간은 죽지 않는다') 본문이 그의 시점으로 서술되기에 필멸하는 인간 세계에서 느껴야만 하는 고독과 비존재감을 잘 요약한 제목으로 재인식됐다.
불멸이란 설정은 실존 개념을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독서 중 장 폴 사르트르 철학을 요약한 피드 게시물을 보고 끄덕끄덕 하게 된 이유.
중후하지만 재미있고, 우아하지만 재미있고, 역사와 지리를 몰라도 재미있고, 또 재미있다. 철학적 언어유희? 내 구역이 아니지도 않(그래, 난 이미 덕후)다. 프랑스어는 번역해도 외계어? 선입견은 완전히 소거됐다. 역자 변광배 선생님께 감사하다.
인간계를 초월한 보부아르 선생님과 (어려서 기억할 수 없지만!) 약간의 동시대를 살아봤다는 것은 (애트우드 선생님이 느꼈을 한세대 차이의 부담은 없되!) 참으로 영광스럽다.
소녀는 미소 지었지만 내게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니었고, 또 미소를 짓는 데 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하늘은 아주 새것처럼 파랬고, 꽃이 핀 나무들은 내가 시지스몬도를 어깨 위에 얹고 있던 날처럼 반짝거렸다. 한 아이의 눈에 온 세계가 태어나는 중이었다. -220p
그때 나는 미래를 향해 나를 던지지 않고 내 가슴속에서 평온하게 박동하는 내 삶을 느끼며, 내 주위의 시간은 구름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신과 비슷하게 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가 될 테지. -312p
그들은 평화롭게 쉬고 있었다. 그리고 나야 죽어 있었지만, 내 부재의 증인인 나는 아직 거기 있었다.
'결코 휴식은 없겠지.' -319p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였고 굳어 있었다. 역대 왕조, 국경, 상투적인 것들, 부당한 일들. 왜 우리는 이 낡고 좀먹은 세계의 잔해들을 한꺼번에 지키려고 악착을 부릴까? -336p
이제부터 내 앞에 펼쳐진 시간은 끝이 안 보이는 유배의 시간이었다. 내 모든 옷은 분장이고, 내 삶은 희극이리라. -420p
변장 아래, 가면 아래, 수 세기의 시간이 단조해준 갑옷 아래 나는 거기에 있었고, 그것은 바로 나였다. 비루한 못된 짓들을 즐기던 보잘것없는 한 존재, 그녀가 불쌍해한 것은 분명히 나 그녀가 모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438p
이제 모든 꽃이 서로 닮아가기 시작했고, 하늘의 색조들도 뒤섞여 버렸다. 그리고 세월은 이제 한 가지 색깔만을 지니겠지. -501p
그들의 것이 아닌 어느 미래를 위해 죽은 자들, 항상 죽고야 말기 때문에 죽은 자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죽은 자들. -510p
그들은 모두 서로 닮았다, 그러면서도 각자에게 삶은 혼자만 아는 특유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결코 다시 시작되지 않는 삶이기에 삶은 각자에게 하나 가득이었으며 하나 가득 새로웠던 것이다. -520p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운명을 실현하려 한 사람들,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548p
나는 완전하게 실재했고, 완전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거기에 있었다. -582p
20년이나 60년간 죽지 않기. 그러다가 결국 죽기.
-586p
파리의 19세기를 보충할 겸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조르주 상드 파트의 일부를 재독했다. 포스카가 여성일 경우 성립하지 않는 스토리가 약간 고구마라면? 로런 엘킨과 함께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