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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Sep 20. 2024

보부아르가 끝까지 간직한 미발표 소설

시몬 드 보부아르 <둘도 없는 사이>

자자는 특별했고-벌집 구멍 중 하나가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 이미 만들어진 거푸집 안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불길한 용어인-"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었다. 틀에서 넘치는 것은 압축되고, 짓눌리고,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자자는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없었고, 그녀의 고유성은 부서졌다.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시몬 드 보부아르의 입양 딸)의 서문


보부아르가 소설을 통해 고발하고 있는 것은 갈라르 부인이 절대 선이라 믿는 극단적인 형태의 신앙심과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에게 강제되는 다양한 억압이지만, 옳다는 명목으로 각자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자리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백수린)


그녀가 우리가 아는 보부아르가 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노력한 것은 어쩌면 일종의 추모였는지도 모른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영문판 서문(614-622p, <타오르는 질문들>, 2022, 위즈덤하우스)


그들은 끝내 '몸으로 대화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들은 부끄러웠다. 사실은 내내 부끄러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줍음에 수치심을 느꼈고, 그 수치심이 몸을 묶었다. 신이 그들의 어떤 부분을 영원히 분질러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망했다. 신이 다시 한번 그들의 쾌락을 금지해주기를. 기쁘게 복종할 수 있도록. -무릎을 붙이고 걸어라(217-271p, 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2022, 문학동네)



종교적 엄숙주의, 아니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는 착각, 누구보다 고집스럽게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걸 증명하는 방법은 끝없는 자기 희생 뿐이었고 그 끝에는 숨막히는 순백색의 꽃무덤이 있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영혼을 잡고 평생 놓아주지 않았던 자자에 대한 자전적 소설인 <둘도 없는 사이>에서 자자의 분신인 앙드레는 상황에 압사당했고 물리적 죽음을 맞고서야 비로소 자유를 찾게 되었다.


결말을 아는, 아니 순서대로 본문을 먼저 읽다가 원서에서는 서문이었을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의 말을 읽고 스포를 당한 채로 결말을 피해 무려 세 권의 벽돌책을 읽었다. 이 얇은 문고판 소설 한 권을 끝내기 위해 앤 레드클리프의 엄청 오래된 고딕 소설과 이미 거의 다 읽은 <보스턴 사람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처럼 고이 모셔둔 (요 네스뵈가 북유럽 느와르의 God-parents라 부르는)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1권을 읽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다음 <둘도 없는 사이>의 결말을 감당하고 그와 관련된 문서를 재검토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소설 속의 결말은 이미 픽션임에도 처음 알게 된 자자의 죽음이나 현실에서 경험한 부고 소식보다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거리를 둔다는 것은 적절한 과몰입을 가능케 할지도.




나는 틀림없이 앙드레가 훗날 책 속에 인생이 적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 중 한 명일 거라고 은밀히 생각했다. -23p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아빠는 패배주의자들을 총살해야 한다고 말했고, 1년 전에는 어떤 고학년 학생이 신앙심을 잃었기 때문에-사람들은 그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학교에서 쫓겨났다. -43p


이 모든 숟가락과 국자, 포크, 칼에 정말 각각 고유한 용도가 있는 걸까? 사람들이 충족해야 하는 욕구가 이렇게나 다양한가? -71p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달콤해 보이는 색깔의 새틴이나 타프타 천, 스퀘어 네크라인, 어색한 주름 장식은 자신의 육체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 교육받은 독실한 젊은 여자들을 더 추하게 만들었다. -90p


영원할 거라고 말할 자격은 몇 살부터 생기는 걸까? -108p


내 주변에서는 향수 뿌린 여자들이 케이크를 먹으며 물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들을 닮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지만, 앙드레는 그들과 닮은 데가 없었다. -170p



나 역시 억압을 재생산하는 (불특정 다수의) 엄마와 요절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남은 평생 두고두고 하게 될 것이다. 그게 평생에 걸쳐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거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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