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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Sep 15. 2024

뒤라스와 와인 한 잔 하실래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집에​ 오는 마지막 호선, 집에 오기 25분 전. 보조배터리 두개가 다 방전됐다. 작정하고 '책을 사러' 나갔던 길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책을 읽으러' 나갔던 길은 더욱 아니었다. 책과 관련한 일정이 있긴 했지만 그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혹은 수행했기 때문에 가방 속에 책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일수록 그냥 나가기 허전해서 샘플북이라도 챙겨 나가게 된다. 가방 안에는 이미 읽고 있던 작은 책이 있었다.


그리고 이 장면, 익숙하다.


작년에는 보들레르였다. 좋아하는 화가의 좋아하는 그림이 그려진 책과 좋아하는 역자가 번역한 책을 두고 한참 고민한 그 책이었다. 책이니까 역자를 선택했고, 덕분에 판형이 작은 그 책은 종종 그냥 나가기 허전한 날을 함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조배터리가 힘을 잃었고 남은 25분은 보들레르가 채웠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소설이지만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보다 얇다. 양쪽의 해설을 포함하면 거의 절반 수준이다. <파리의 우울>은 역자의 해설이 훨씬 길고 그때만 해도 해설의 마력에 빠지기 전이라 해설은 읽다 말았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해설은 (주관적으로) 적절한 분량이되 프랑스어 문법이 포함된 관념과 철학으로 가득하지만, 모호하고 모호함에 끌리는데 왜 끌리는지 모르겠는 본문에는 더없이 어울린다.




이 책으로 뒤라스에 입문한 것을 나중에 어떻게 재해석할지 벌써 기대된다. <파리의 우울> 해설 뒷부분을 읽어야 한다는 (잊고 있던) 숙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책방에서 눈이 맞기 전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뒤라스 혹은 그처럼 이름만 들어본 작가들을 (가능한 많이) 들여놓겠다며 계획을 초과한 책쇼핑을 했던 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유디트 헤르만과 함께 (가상의) 장바구니에 담겼다. 그날도 계속 소설만 구입하려는 관성을 끊으려고 (에세이도 구입했지만) 뒤라스 옆에 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동물시집>을 뒤라스와 함께 챙겼는데 이 책은 라울 뒤피의 그림이 수록된 화집으로 유명하지만(심지어 그중 일부는 라울 뒤피 전시의 체험코너에서, 목판화 셀프 제작 후 소장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파리의 우울>과 같은 역자의 책이다. <동물시집>의 본문은 그림일기처럼 아주 짧고, 프랑스어 원문이 함께 실려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를 좀 해...




정원의 북쪽 끝에서는 목련꽃이 향기를 토해내고, 그 향기는 모래언덕을 넘고 넘어 멀리 사라져간다. 오늘 저녁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온다. 한 사내가 라메르가를 배회하고 있다. 한 여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90p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표면 너머까지 뚫어보지 않으면 무슨 선문답인가 했던 프랑스 영화가 생각나면서도 인물의 시선, 행동, 어조 등을 글로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깊은 이해가 가능한, 언어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게다가 프랑스 먹방이라니. (그리 유쾌하게 읽을만한 장면은 아님주의) 와인덕후라면 미리 좋아하는 와인을 (단, 너무 많지 않게!) 준비해두고 시작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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