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친구와 책으로 연결된 친구들

어떤 날은 책으로도 충분하다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권여선, '봄밤(2013)', <안녕 주정뱅이> P.25


책이라는 친구



'술보다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보다 술과 함께한 날이 더 많았다. 그렇다고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술도 사람도 없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 날은 주로 책, 가끔 넷플릭스와 함께 한다.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있어야 한다. '나'는 항상 있지만 '사회적 자아'는 항상 있지 않다. 오늘은 남이 타준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나와 적어도 모두 잠들기 전까지는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내가 충돌했다. 결국 (글을 쓰기 위하여) 커피가 1승했지만 결국 '사회적 자아'가 없는 상태로 짧은 외출을 결심했다가 집주인 어르신께 인사도 못하고 도망치듯 들어왔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날,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을 감수하는 대다수의 사회적 존재들에게 감탄하는 부분이다. 다들 어떻게 감당하나요?


여기까지만 보면 굉장히 샤이한 I성향의 전형적인 방구석 책덕후처럼 들리겠지만(봤는데 왜 들리는지는 알아서 상상하시길) 실제로 굉장히 명랑한 E성향의 휴면 댄서(끝까지 아마추어로 버티면 한동안 요가만 해도 랭킹을 유지하겠지?)이자 은퇴한(?) 사업가, 강제휴업 중인 여행크리에이터였다. (사람을 만날 때 준비할 것이 많다는 의미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다. 코로나 직전에 '이미' 디지털 노마드로 전향(?)했는데 정작 거리두기가 해제되어도 한 달에 2주일은 동네 카페투어(가끔 본의 아니게 국내여행으로 확장), 나머지 2주일은 방구석 돌체구스토 홈카페 멘탈여행이다.


어떤 날은 책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한편 어린 시절에 몰랐던 것 하나는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은 욕망을 충분히 가져도 된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 계획하느라 아직도 매번 꼬이는 유럽여행은 올해 또는 내년에 갈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오늘을 살아남아야 한다.)




켈리 잔의 바닥 부분만 채워서 30잔 이상 마신 것 같은데 취하지 않고 전투력만 뺏겼다. 집에 있는 커피는 인스턴트만 남았고 남이 타준 커피가 절실했다. 읽던 책 중에서 바로 열정이 차오르는 부스터가 없었다. (밀란 쿤데라는 도입부, 조지 오웰은 영어판을 읽고 있다.) 데일리 책등테라피를 위해 바로 눈앞에 꽂아둔 <안녕 주정뱅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권여선 의존증이 오래갈 것 같다.




책을 부르는 책



지난가을, 앤솔로지라고도 할 수 있는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입문한 권여선 작가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덕통사고였다. 저자 인터뷰가 수록된 어텐션북을 며칠 동안 끼고 지냈다. 본인 추천 대표작이자, 소설가들이 선택한 '올해의 소설'인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읽고 얼마 후 중고서점에서 다른 독자님이 추천한 <안녕 주정뱅이>와 옆에 있던 <아직 멀었다는 말>까지 구입했다.


권여선 작가의 인생책인 <전쟁과 평화> 4권 세트를 크리스마스 때 구입하려다, 바로 읽지 못할 것 같아서 잠시 보류하고 있다. 해가 바뀌고 이제 생일이 두 달 앞이라 그 안에 쟁여놓으려고 한다. (무슨 상관이람.) 그리고 오늘, 별생각 없이 집어든 <안녕 주정뱅이>에 수록된 가장 오래된 소설이자 내가 소장한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소설인 '봄밤'에서 톨스토이를 간접적으로 간접경험한다.


<안나 카레니나>를 완독 했는지 확신이 없다. 영화를 보려고 책을 샀는데, 정작 영화를 봤는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고작 이십 대 후반의 기억이 이 정도라니.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면-최근에 전경린의 <황진이>를 재독 했고, 작년에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재독 했다.-내 마음속 썸네일로 등록된 한 장면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처음 보는 책처럼 생소하다. 정말 읽을 책이 없을 때는 전에 읽었던 책만 다시 읽어도 한동안 즐거울 것이다. 스물아홉부터 서른여덟에 걸쳐 다섯 번 정독한 <밀레니엄>도 슬슬 재독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읽을 책이 없거나 그럴 일이 당분간은 없지 않을까. 책태기조차 권여선의 단편 하나면 순삭될텐데. 완전 방심하고 (빨리 글을 써야 하니) 급한 대로 극약처방을 했는데 10분 만에 대성통곡하고(무음으로) 순도 100%의 독서테라피를 하지 않았나.




대기 중인 독서계획 최전방에 계간지 <문학동네> 겨울호가 있다. 완독을 할 수도, 할 필요(?)도 없어서 그야말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한편, 생각보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아니, 책은 수학문제집 사이즈인데 글씨는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생각보다 손이 가질 않는다. 한번 잡으면 또 알라딘 장바구니를 편집해야 한다. 문학평론이 업인 작가들이 인용한 소설과 철학서는 다 읽을 생각이 전혀 없지만(어휴, 톨스토이만 정주행해도 50이 넘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내가 꼭 만나봐야 할 작가들을 '종이책'이라는 형태로 소개해주니 영업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장바구니에서 끝없이 탈출하지만 끝없이 복귀하는 책 중에 임솔아의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실비 제르맹의 <밤의 책> 등이 있다.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읽을 것이다. 장바구니를 들락거린다는 것은 향후 2년 이내에 읽겠다는 의지, 하지만 2개월 이내에 읽겠다는 건 아님주의.


실비 제르맹은 한 달 전에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발굴한, 나만 모르는 작가였다. 역자인 김화영 선생님의 필모를 최소 두 번은 정주행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화영의 역서 <마담 보바리>와 <이방인>을 읽었고, 이윤기의 인생 작가인 미셀 투르니에도 김화영이 번역했다.) 토마스 만의 역자 중 한 명인 임홍배 선생님의 역서는 앞서 언급한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최근에 읽었지만(초독은 다른 역자의 책이었다.) 토마스 만의 단편을 파일로 받아서 읽고, 그 리뷰로 임홍배 선생님의 수업에서 A를 받았다. 단행본으로 읽지 않았음에도 토마스 만이 인생 작가 목록에 있는 이유다.


임솔아는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발견한 작가였는데 그때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든 세션에 참여할 수 없어서 포기한 작가들 사이에 파묻혀있다가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책이 자꾸 눈에 띄면서 반복적으로 영업당하고 있다. 이 행사 관련 콘텐츠에 먼저 좋아요를 해주신 황모과 작가님은 맞팔도 3초 만에 해주셔서 바로 책 두 권을 구입하고 리뷰도 했다. (작가들의 구체적인 활동에는 그만한 힘이 실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외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 과감하게 영어 북토크 세션을 신청했는데 덕분에 진은영, 박상영, 백은선 작가와 해당 세션 진행자인 송종원, 양경언 평론가도 만났다.




계간지에서 재발견한 임솔아 작가 덕분에 서울국제작가축제까지 리마인드 했다. 장바구니에는 발자크의 <사라진>과 정해연의 <홍학의 자리> 등 3월에 읽을 책과 일단 쟁여둘 책들이 있다.


보관함에는 1087권이 담겨있다. 앞으로 8년 동안 대략 1000권을 읽고 '기록'까지 하겠지만, 신간과 나만 모르는 작가가 계속 등장할 테니 이 중의 일부는 결국 밀려날 것이고(특히 영어책) 소장하고 있는 책이 다른 책을 불러서 구성이 조금씩 달리질 것이다. 토베 디틀레우센의 '코펜하겐 3부작'을 읽다 말고 먼저 알게 된 다른 덴마크 작가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었다. (겨울에 읽으면 좋지만 지금도 아슬아슬하게 늦진 않았다!)


그보다 먼저 구입한 스웨덴 커플 작가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권 <로재나>도 곧 시작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은 꼭 읽겠다는 의지보다는 <스밀라>의 여운을 달래고 싶을 때 바로 시작하려고 대기시켜 두었다. 시리즈 1권을 읽고 여운이 너무 강하다면 요 네스뵈나 스티그 라르손의 영어판을 읽을 것이다. 이들의 한국어판은 너무 중독성이 강해서 일부러 치워놓았다. (맞아?)


이런 이야기를 하루종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수요일 연재를 지킬 수 없으므로 무브 온. 오늘의 진짜 주제는 내 마방진을 구성하는 책탑보다는 이런 책썰을 함께 나누는 친구들이다.




책으로 연결된 친구들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특히 돈독해지는 관계가 있다. 특히 좋아하는 작가들, 인생 작가일 경우 그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책 관련 기록을 남긴 독자까지 좋아하게 된다. 책덕후가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드라마도 결국 '작가'가 쓰는 것이므로) 책이라는 연결고리는 참으로 묘하다.


책친구, (따로 책 모임을 하진 않으니) 주로 인스타를 통해 알고 지낸 인친들의 경우 특정 작가를 언급할 때 나를 기억해주기도 한다. 그중에 엘레나 페란테와 스티그 라르손, 권여선 등이 있을 것이다. 책스타를 영어책으로 시작했으나 국내서 관련 기록을 통해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과 끈끈해지는 매력을 놓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나의 책친구들은 베스트셀러나 신간을 비롯해 고전을 꾸준히 읽고 각자의 깊이로 진정성 있는 기록을 하는 사람들이다. 책 취향이 비슷하다고 특히 친해지는 건 아니다. 책 취향은 독자의 성향과 비슷한 결을 가질 때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보여주고 싶은 취향과 실제 취향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 밖에도 자기표현에서 강조하지 않으면 끝내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2023년과 같은 경우 독서계획부터 대부분 여성 작가들 위주였고, 실제로도 거의 여성 작가들의 책만 읽고 리뷰했으며 애매한 책은 아예 완독을 안 하거나 완독을 했어도 리뷰를 안 했다. (일부는 브런치에만 했다.) 그렇기에 때로는 흔한 페미니스트(를 향한) 공격을 예상하고 긴장하는데,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다. 안티 페미니즘 성향이 있는 사람과는 알고리즘 덕분에 만날 일이 별로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사람과도 딱히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분들을 타자화할 생각은 없지만, 어찌 보면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눈에 나는 되게 부족한가 보다,라는 생각도 든다. (어휴, 이놈의 인정욕구)


뭐, 그래서 불만인 건 아니다. 그냥 나는 1인 시위를 하는 기분으로 나왔는데 돌은커녕 꽃다발만 받고 있어서 가끔 어리둥절하다. 꽃다발 받으려고 나왔다는 오해나 안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계속 불안하다. 돌과 오해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가 없다. (비록 친구들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하지만) 그래서 내 모습이 나온 사진을 조절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생샷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적 고뇌라기보다는 난 둘 다 할 수 있는데 둘 중 하나로 보이기 싫은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그만. 나는 反흑백논리를 지향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순수한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뭐가 됐든 입장이 너무 분명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또한 나는 백이요,라는 주장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두루뭉술하지 않다.


세상에는 두 가지 순리가 있고 그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럼에도 우주적 사고와 인간중심적 사고는 다르다. 인간이 주장하는 순리의 상당수는 인간계의 렌즈로 자연계를 관찰해서 끼워 맞춘 것이 많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일찍 철학을 배웠지만 거의 평생을 이공학도로 살아왔고 여전히 지금도 그러하다. 과학을 그렇게 사랑하고(신봉하진 않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전공했으면서 왜 그렇게 소설을 좋아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성차별주의에 거의 평생을 바치고 남은 평생도 바칠 예정이면서 왜 그렇게 반여성적인(?) 의상을 좋아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걸 따지는 것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흑백논리다. 그럼에도 내 안의 타자들이 계속 잔소리를 해서 시끄러워 죽겠다.




내 친구들은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가 사람 욕심이 많아서 항상 혼자 스스로 부대낀다. 지나쳐야 할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애정을 쏟고 혼자 실망한다. 아니, 좀. 좋은 사람들에게 집중하라고.


좋은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과 잘 지내고 동시에 두루두루 잘 지낸다. 나도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 중에는 주변에 사람이 꽤 많아서 중심까지 거리가 살짝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동병상련이라고, 그런 사람들끼리 무언의 시그널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예 말을 안 하면 짐작하기도 어렵지만 말을 하되 직접 하지는 않고 행간에 시그널을 넣는 것이다.




색이 분명하고 싶은 동시에 스펙트럼이 넓고 싶으면 안 되나? 안 될 건 또 뭐야. 이렇게 계속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양자택일을 하려고 한다. 이 친구에게 더 잘하고, 저 친구와는 거리를 두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친구의 성향이 아니라 일정하지 않은 거리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애정이 일정하겠어. 하지만 어느 정도 일정할 필요도 있다. 최근에 친해진 친구들과의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전망한다. 우리가 짧고도 나름대로 긴 시간을 함께 하는 동안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지나치게 가까웠던 사람과는 권태기를 거쳐 제2국면을 맞고 있거나, 이미 끝났다.




책을 부르는 친구들,

친구를 부르는 책들



책친구들은 서로 책을 소개하고 선물하고 때로는 빌려주기도 한다. 과학대학이나 댄스 동호회에서 책 친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번 발견하면 놓치지 않는다. 리뷰 속 미니픽션에 등장하는 내 친구 유진이(가명)는 대학시절에 참여했던 몇 안 되는 독서모임과 관련 활동을 공유했고 여전히 책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다. 간병 기록으로 올리비아 랭 못지않은 에세이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을 출간한 성아는 전공이 아예 다르지만 그녀의 병원 생활과 나의 책덕후 경력이 흥미로운 조합을 이끌어냈다. 애초에 과학도이자 소아암병동의 뮤지션이었던 다채로운 이력이 나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책들과도 환상의 합을 이루었지만. (리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리뷰 참고) 미적 감각이 탁월한 친척동생은 본캐가 의사인데 어떤 책을 좋아할지 몰라 <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을 선물했다. 책스타그램과 블로그의 세계로 안내한 동시대 인생 작가 권호영의 책은 얼마 후 갑자기(?) 유럽 여행을 가게 되는 동생의 취향을 저격했다.




연락의 빈도와 대화 주제, 놀이 취향, 책 취향(영화 취향), 주량 같은 것들은 너무도 사소하면서 너무도 치명적이다. 폭음을 예상했던 장례식에서 혼술을 하기도 했고(우리 모두 나이가 들어, 내 친구 A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한다.) 그날의 아이러니한 조합(차마 논픽션으로 서술할 수 없는)을 회상하던 우리는 도서관에서 주객전도(?) 되었다. A가 '책덕후인 나'에게 새로 생긴 도서관을 소개했는데, 그녀는 내가 소개한 책을 읽느라 토끼굴에 빠져있고 정작 나는 너무 조용한 곳에서 현기증을 느껴 아기처럼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다.


그녀는 책을 좋아한다. 그녀의 가족 서재에는 대학원 갈 때 빌려준 내 전공책이 있었다. (지금도 있을 것이다.) 아들 주라고 넘겼던 저자 증정본 어디 있냐고 물어봤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휴, 말을 말자.) 그녀의 집에서 2박 3일을 했을 때 온 가족이 책을 읽던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일인가 보다. 요새는 웹소설을 읽는 것 같다. 내 학사논문 공동저자인 A는 머지않아 육아를 졸업할 것이다. 일찍 놓아준(?) 보람이 있다.



얼마 전 인친님들의 북클럽에서 책 친구 말고 그냥 친구 있냐는 주제로 토크가 있었다. 물론 그냥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다. 책 친구보다 더 자주 연락(?)하는 친구는 일단 없다. 인스타 친구의 근황토크는 책 친구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냥 친구는 어차피 댄서 친구와 대학 친구인데 그냥 잘 지내는 것으로 서로 만족한다.


실시간으로 근황을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다. 작년에 결혼식과 장례식에 연속으로 다녀와서(같은 학교지만 교집합은 없다.) <응답하라 2002>가 되었으나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정말 이례적으로 결혼식에 초대한 당사자인 신부가 인스타, 블로그 유저일 뿐. 공통분모는 한강을 품은 KTX 정도?


그럼에도 인스타그램 비유저보다는 심리적 거리가 훨씬 가깝다. 비유저와는 카톡으로 근황토크를 해야 하는데 카톡 접속주기가 점점 길어진다. 별로 할 말도 없다. 욕구로 보자면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일단 약속을 잡는 것 자체가 꽤나 높은 목표다.) 만나기보다 오히려 그냥 기분 좋은 아무 날 춤을 추러 가고 싶다. 아무 날 만나는 랜덤 친구가 단톡방이나 카톡 즐겨찾기에 있는 친구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


물론 따로 챙겨주고 싶은 친구(보다는 언니)들도 있다. 다만 겨울의 홈카페모드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구역이다. 팬데믹, 집단우울증, 때 이른 거리두기 해제의 역습(두 번째 감염), 송년회 후유증까지. 이제 거의 마지막의 마지막이다. 팬데믹 4년 차의 겨울의 마지막 날. 어차피 내일은 윤일이다.




책을 읽고, 이 책을 좋아할 만한 친구에게 소개를 하고 이 책을 이미 읽은 친구와 소감을 나누는 즐거움은 독서공동체의 고유한 매력이다. 유진이(혹은 성아)와 함께 하던 시절에는 독서보다 집단 지성 활동의 비중이 컸다. A와는 카톡과 KTX라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이번에 내 인스타를 팔로우하긴 했지만 본인이 활동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인스타그램 초기 친구들은 여행과 공예 또는 (당연히) 댄스가 주요 콘텐츠인데 그럼에도 연결되어 있는 친구들이 있다. 댄서 친구의 경우 실물을 먼저 봤다면 인친이라고 할 수 없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한 번만 봤거나 어쩌다 한 번 본 사람들이 많으니 별 차이가 없다.


인친과 실친에 구체적인 선은 없다. 과거의 나를 모르는 사람과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되기도 하고, 과거의 나를 모르기 때문에 못하기도 한다. 오프라인에서는 현재의 내가 에너지로 구현되는 한편 온라인의 나는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독서공동체가 온라인 온리는 아닌데, 그렇다고 오프라인에 딱히 비중은 없다. 독서모임이라면 차라리 오프라인으로 하거나 안 하고 싶다. 북토크와 같은 오프라인 활동을 좀 해볼까? 하는 시점에 은둔자 모드가 발동했다. 그래봐야 한 달이다. 불과 4주 전에는 주 2회 북토크를 하지 않았나. 저자들이 실친이거나 실친에 준하는 인친이라서 그렇지.




내 인생책들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내 책친구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친구 찾기 깨알팁은 다모임 이래 누적된 방법부터 스레드를 통해 발견한 방법까지 다양하다. 그렇게까지 진심을 다해 친구를 '찾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는다. 게다가 친구(라는 개념이 아닐 수도 있지만)에 대한 이상형에 따라 같은 방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와 소통 방식이 비슷한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방식으로 그대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야겠지.


<독서테라피>를 기획한 4개월 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40년 동안 누적된 친구에 대한 이상형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온라인 책친구가 30% 이상 늘어났고 이 정도면 구성이 바뀌지 않을 수 없는 비율이다. 의도적으로 구성을 조금씩 바꾸기도 했다. 여행과 외국어를 좀 더 비중 있게 생각했던 3년 전만 해도 내가 30대였고(웁스!) 나보다 어린 친구들(25-34)이 타깃이었다. 지금은 기존 타깃의 사각지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내 소속집단인 40대 여성(이 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브런치스토리와 같은 플랫폼에 접근하기 유리한 입장인 것도 사실이다!)의 인구구성의 언밸런스에 따른 소외감도 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40대 여성이 기혼 유자녀 여성인 것은 디폴트가 '아니다'. 비자발적 딩크는 할많하않이고, 그처럼 배려조차 받지 못하는 투명인간은 비혼(또는 비자발적 미혼) 여성이다.


아니, 뭘 새삼스럽게,라는 생각으로 그냥 스킵할 때도 있다. 비혼주의 32년 차의 내공이다. 하루 이틀 겪는 게 아니라서 굳이 말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비자발적 미혼이었던 꽤 많은 친구들이 최근 3년 동안 우후죽순처럼 결혼하고 갑자기 혼령기를 급상승시켰다. 게다가 우리는 2차 베이비부머라는 별명을 가진 밀레니얼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뱀파이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듣기 싫은 질문도 오래 들어야 한다.


부모님은 10년 전에 그만두었고, 친구들은 별로 할 생각이 없으며, 내 나이를 아는 사람들은 5년 이상 하지 않았던 그 질문 말이다. 일부러 나이를 계속 흘리는 것도 그런 반작용이다. 어렸을 때 꿈이었던 뱀파이어가 됐는데(?) 이 부작용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끔은 보통명사 '아기'를 언급하면 그 대상을 고유명사(?)인 '내 아기'로 인식하는 친구들도 있다. 굳이 정정하지도 않는다.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고정관념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장기적으로 잘 지내고 싶지만 또래 친구들이 더 많아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기존 친구로 만족을 못하는 건 아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원할 뿐. 그런데 친해질 가능성이 있는 또래집단에 본격적으로 어필한 적이 없었기에 여기가 블루오션일세. 문제는 여전히 '그 문제'가 있다. 기혼 유자녀 여성의 시각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결고리는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가장 강력한 계면활성제이기도 하다. 책이다.


남성 독자들이 간혹 본인의 한계를 언급하거나 회색지대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리뷰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떤 지점에서 비혼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 심정을 상대는 잘 모를 것이다. 혹은 자신이 거쳤던 젊은 '미혼 여성'의 입장만 생각할 것이다.


대스승으로 여기는 노장들은 유손자녀 여성, 즉 할머니가 많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할머니적 오지랖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고, 엘레나 페란테도 확실하진 않지만 자녀는 있는 것 같다. 아니 에르노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비혼 무자녀 여성이어도 경험치나 독서 이력에 따라 함께 호흡할 수 있다. 다만 그 호흡에 대해 완전히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려면 리뷰를 쓸 때마다 파혼 이력 같은 것을 다 첨부해야 하는데 여기까지만 봐도 피로감이 몰려들지 않나?


중년의 친구란, 참으로 복잡한 존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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