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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y 05. 2024

낮술 충동

단편소설 <겨울의 책방산책>

석류는 숨어있던 스타였고 이제 막 그 실루엣을 드러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돋보이길 원했던 적 없다. 주목을 받는 지우, 주목을 받아야 사는 지우를 가감없이 바라보았고 그게 좋았다. 지우를 통해 자신에게까지 조명이 스치는 것을 감당할만큼.


그녀는 바라보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존재였다. 지우가 내내 석류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석류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지우가 자기도 모르게 은둔을 시작한 첫째 주, 석류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지우는 오직 석류를 바라보기 위해 존재했지만 석류는 업무와 업무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지우와 마주쳤고 그녀가 포착한 순간들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석류에게 지우는 업무이되 업무 중 오아시스인 역할을 병행했다. 늘 그렇듯 깨달음은 뒤늦게 왔다. 정말로 지우가 어디 멀리라도 갔으면 어쩔 뻔 했어. 둘째 주에 '왜 지우누나 안 와?'라고 영문을 모르는 스스로에게 이백오십번 쯤 셀프 질문을 하고서야 알아차렸다. 그녀가 보름이나 부재했구나.




셋째 주에는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는 상태로 초조함과 적당히 대치했는데 이게 한계다. 그보다 굳이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면 될 것을. 그가 이렇게까지 참은 것은 (인생의 섭리로 봤을 때) 지우가 더 오래 참았(고 그러느라 여지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작에 그를 붙잡았다면 석류가 지붕 쳐다볼 일이 없었겠지.


하지만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이 아니듯, 좋아한 순서대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바라보는 시선은 당사자인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에게만 증거로 남았다. 어쨌든 석류는 행동에 나섰다. 무슨 일 있냐, 없다. 바쁘신거냐, 그건 아닌데 화실에 발이 묶였다. 누나 화실이 대학로 근처냐, 그렇다. 대학로에 좋아하는 커리집이 있는데 가면 사줄거냐, 당연히 사줄거다. 언제 가면 되냐, 일요일에 와라.




"그런데 그집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야?"

"아, 커리집이요? 거기 안 가도 돼요."


지우는 분 단위로 계획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특히 낮에는 30분 단위의 시간 개념이 확실했고, 무엇보다도 석류를 더 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했기 때문에 약간 배신감이 들었다.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만났어도 되는 거였잖아? 라는 생각이 0.1초만에 스쳐가고 결국 석류가 그녀에게 오기 위한 핑계를 댄 것을 알아챘다. 석류는 그녀의 화난 표정이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미소로 맑게 개는 것을 보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전율을 느꼈다. 지우가 그를 처음 봤던 날의 '뱀장어 체험'은 각자에게 합의되지 않은 채 찾아와 둘을 하나의 자기장으로 초대했다.


"누나 가고 싶은데 가요. 브레이크 없는 곳으로."

"추우니까 저기 앉아서 검색하고 나가자."


무슨 정신으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는 없지만 어지간해서는 석류가 그녀에게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아 한켠에 안심이 놓였다. 어떤 남자애들은 데이트 한 번 하자고 줄기차게 쫓아다녀 놓고도 밥이 맛이 없네, 영화가 재미 없네, 이런 소리나 늘어놓지만 석류는 여전사가 아끼는 동생이 아닌가.


"여기 샤브샤브 잘 하는데 브레이크 없대."

"지금 가면 사람도 없을 것 같고 좋은데요?"

"그치? 나 여기서 종종 맥주도 마시거든."


점심 운동을 하고 2시부터 혼술을 하는 단골집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석류니까 괜찮았다. 이 시간부터 맥주를 마셔도, 일단 지우 자신이 어색하지 않은 공간에서 석류를 바라보기 적절한 혈중 알콜농도를 추구할 것이다. 그런데 석류가 술을 마시나?




석류는 이미 만취한 친구들을 따라잡으려고 급하게 아무 술이나 마시던 약속들을 당장 정리하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맥주 한 캔을 마시다 잠들면 된다. 지우와 새벽에도 만날 수 있을까?


"저도 맥주 좋아해요."

"퇴근하고 여기 와도 돼. 늦게까지 하니까."

"그 시간에 안 자요?"

"잠이 안 와서 나와있을 때도 많아."


네가 온다는 확신이 있으면 잠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속으로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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