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짙고 어두운 밤이 한가운데서 잘려 두 토막의 검은 잠으로 쪼개졌다. 그녀는 어디 있을까? 그 두 토막 사이, 시간도 공간도 없는 빈 틈새에 고립된 채, 그것들을-그녀가 이미 잔 잠과 아직 자지 않은 잠을-바라보고 있었다. 이 기간은 삶의 시간에서 배제될 터였다. -207p, 오타비우와의 만남
하나의 바위가 흔들리다가 다른 바위에 부딪혀, 그것이 바다로 떨어져 물고기를 죽이게 되었을 때 그 바위가 지닌 힘. -222p, 리디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분위기를 섬세하고도 가급적 성실하게 묘사해 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데뷔작을 읽었다. 작품 안에서 서술자의 페르소나 혹은 작가로의 자아가 성장하는 것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날 것의 감각과 그에 대한 슬픔과 증오까지 낱낱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그 경험으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서술한다.
욕망보다 결핍이 도드라지는 한편 그로써 욕망은 이중부정으로 긍정되는 듯하다. 코펜하겐 삼부작에 이어지는 암실문고 시리즈인데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예상대로 결이 비슷하지만 스타일은 다르다.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는 부차적이고,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사건보다 다른 것에 훨씬 더 주력한다.
중요한 사실이 전달되는 순간의 분위기, 각각의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멈춤과 슬로모션 이후 새롭게 일어나는 감정과 같은 것들. 스토리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의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심지어 진부하다. 감각을, 혹은 감정을,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를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감각을 묘사하거나 그에 관한 언어의 창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면 곁에 두고 종종 꺼내볼만하다. 감각에 탁월한 시집 혹은 감정에 관한 사전처럼 활용해볼 수 있는 책이다.
미국드라마 <가십걸>처럼 눈이 확 뜨이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 새롭지도 않은 짧은 장면이 많은 것을 보여주면서 작품 초반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힌다. 그 포인트는 매우 사적인 동시에 창작자가 공들여 만든 흔적이 느껴지는 구간이다. 이런 작품, 이런 작가를 어찌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얼음을 가득 넣은 욕조처럼 차갑고 강렬한 악이 담겨 있는 무시무시한 소설들을 읽을 때도 마음이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가 물을 마시는 걸 지켜보며 자신의 깊고 해묵은 갈증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그저 삶의 결핍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가능했던 것보다 적게 살고 있었고, 그녀의 갈증은 홍수를 요구했다. -23p, 주아나의 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흐름을 막고, 그녀와 그녀 자신 사이에 있는 틈새를 허용하고, 그럼으로써 훗날 아무런 위험 없이 새롭고 순수한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29p, 오타비우
사실, 그런 사건들은 말로는 기억할 수 없는, 심지어 언어의 형태를 지닌 사고로도 기억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유일한 방법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느끼는 것뿐이었다. -201p, 작은 가족
그녀가 경험한 것들과 그녀 자신을 연결시키는 혈관은 이미 잘려 나가 있었고, 그렇게 잘려 나간 것들은 저 멀리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그녀에게 논리적인 연속성을 요구해 왔었지만, 늙어 갔고, 죽어 버렸다.
-255p, 그 남자
방에 정적이 감돌았고, 뚜껑이 열린 피아노의 흰 건반에는 빛과 공허가 자리했다. 무언가가 천천히, 진실하게 죽어 갔다. 삶의 기쁨을 그 순간에 다시 연결하려는 건 부질없는 짓일 터였다. -291p, 독사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없는 태고의 본질적 고독을 눈 앞에 생생하게 들이미는 묘사를 통해 읽는 자가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할 수 밖에 없도록 종용한다. 기존의 언어들에서 한계를 느껴왔다면 그 너머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