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루페 네텔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거야>
‘이네스’라는 이름에 담겨져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같이 있는 한 네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말이 진심이지만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 이 불가해하고 불확실하고 무시무시한 세계에서 엄마가, 혹은 아빠가, 아니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이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옮긴이의 말(최이슬기)
아무리 애를 써도 영원히 해독하지 못할(144p) 마음과 더불어 비혼 여성 시점의 공동 육아를 말한 과달루페 네텔의 장편소설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는 2023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아니 에르노의 추천사를 받기도 했지만(마침 이 책을 구입한 날, 아직 읽지 않은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을 작정하고 데려왔다.) 복숭아빛 표지와 함께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으로 구매욕을 자극했다.
어쩌면 책표지를 디자인하고 책에 물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이 책에 담긴 저자와 역자의 마음이나 그 마음에 영향을 준 에너지들이 관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책의 외형이 책이 품은 세계에 미달하거나 초과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적어도 이 책은 너무 현실적이라 어리둥절한 동시에 그럼에도 표지처럼 솜사탕 같은 유토피아의 맛이 있었다.
극사실주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 무자녀 여성과 적당히 동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일러두는 책이다. 이네스나 니코 같은 아이들은 돌봄양육자 특히 엄마에게 과중한 의무와 책임이 부과된다. 자기 자식이 아니라서 오히려 사랑과 의리로 이런 짐을 나누어 들 수 있는 이모나 이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이모나 이웃의 위치에서 쉽게 나서지 못하는 심리적 장벽이 있다. 양육권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지쳤고 평가당하고 싶지 않은 엄마들(도움은 당연히 필요하고 결코 당신이 부족한 게 아니다!)에게 성가심을 추가하고 싶지 않은 마음, 결국 책임질 수 없는 일시적 돌봄이라는 죄책감.
당연히 내가 우선이고,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관여할 생각이 없지만 그저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기적인 여자’라는 태그를 달고 사는 마당에, 그야말로 현실적인 이유(아이를 좋아하는데 낳을 수 없고 보모로서 급여를 받는다거나, 이웃집의 불화와 벽간소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거나)로 돌봄을 조금 나누어 지는 게 이기적이기만 한 걸까.
그럼에도 이미 친구이자 동지인 몇몇 엄마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가 ‘너는 모른다’고 외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솔직히 나는 알기 싫다. 그냥 아이를 키우는 게 모두에게 덜 힘들어야 한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고통받고 있지만 오만한 (내 알바 아닌) 다른 엄마들도 덜 고통받아야 각자의 자아실현을 하고 마음을 열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를 부르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 여긴다. 너무나 두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 그런 일인 것이다. -85p
그렇게 그녀는 다른 여자들도 그녀와 비슷한 순간을 경험했음을 깨달았고, 직접 그녀들을 만나고 부둥켜안은 채 자신의 자식과 다른 여자들의 자식들을 위해 울 수 있었다. -96p
알리나는 원예의 대가였다. 식물과도 그렇게 관계 맺을 수 있는데, 자기 딸과 못 할 이유가 있을까?
-146p
날 판단할 테니까. 넌 항상 그러잖아. 난 그게 신물이 나. -187p
아마 애착을 내려놓는 것에 대한 집단적 연습의 일환인 듯했다. 동시에 우리가 만드는 것 중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255p
태어나자마자 죽을거라는 진단을 받은 알리나의 딸 이네스와 가정폭력 위기에 놓인 도리스의 아들 니코는 아이들 고유의 생명력으로 주변의 어른들을 감화시킨다. 아이가 처한 상황에 과몰입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회피성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엄마들이 가장 먼저 의식하길 바라는 단 하나는 이거다. 우선 아이에게는 독자적인 인격이 있다.
여전히 아이 시점에 더 과몰입하는 무자녀 비혼 여성인 나 자신을 포함한 ‘자식’들은 엄마를 좀 그만 평가하자. 엄마라는 시험기간에 종료벨을 울려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