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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22. 2024

정신적 상처를 소독하려면 말이 필요하다

마리 카르디날 <말하기 위한 말>

모두가 그것에 민감하지는 않다. 그것은 광기이거나 천재성일 때만 드러나니까. 하지만 그 두 극단 사이의 것으로, 상상이나 환상, 신경쇠약이나 꽃꽂이, 무면허 치료사나 의사, 마녀나 사제, 여배우나 신들린 사람으로 나타난다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296p


내가 거기서 널 꺼냈어. 친구. 널 거기서 끄집어냈어!

-340p


​소설 <말하기 위한 말>(1975)은 1983년과 2018년에 각각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되었고, 영어판 출간 후 하버드대학교 문학부와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등 750개 이상의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했다.

-저자 소개(앞날개)



안 미치는 게 더 이상한 삶의 조건을 목격한다. 너무 큰 불행, 너무 치밀한 속박, 너무 불합리한 재난, 너무 고독한 치유의 과정. 또한 이제는 어느 정도 베일을 벗게 된 광기의 한 축, 계급과 젠더라는 이중구속에서 구슬 속에 박제된 압화처럼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야 했던 여성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그 중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위기의 주부들>의 브리 밴 더 캠프(혹은 캐서린 메이페어)는 그 광기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하고 끝없는지 몸과 마음을 다해 보여준다.




여자들이 만들어내고,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가르치는 공포. 우리의 취약함에 대한, 스스로를 완전히 닫을 수 없는 전적인 무능력에 대한 공포. -382p


그럼에도 그 미친 여인과 나는 동일한 한 사람이며, 우리는 서로 닮았고, 서로 사랑하고, 잘 어울려 살아간다. -398p


미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430p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를 참는다는 게 어떤 화를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20년전 서울여성영화제에서 화병(火病)을 꽃병(花甁)으로 치환하여 형상화한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다. 강렬한 기억을 남긴 언어유희였다. 지금은 꽃병에 담긴 꽃처럼 살았던 양갓집 규수들의 마음속에 가득했을 울화가 보인다.


​‘나’의 화를 억압하던 ‘엄마’도 사실은 자기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나긴(길고 아프고 끔찍한) 치유 여정을 따라가다 마침내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순간, ‘엄마’는 자신의 화에 잡아먹힌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짜여진 (그런데 실화기반인) 자전소설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결말부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페이지가 이어진다. <말하기 위한 말>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 같다.



미친 듯이 읽다가 미칠 것 같을 때는 좀 천천히 읽느라 오래 붙들고 있었다. 읽는 동안 이 책을 추월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유작 <둘도 없는 사이>와 겹쳐보는 재미(와 고통)도 있었다. 시공간적 배경으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한 스푼 들어있다.




이제 나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미칠 듯 사랑했고 이후에는 증오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마침내 자발적으로 포기해버린 존재로 그녀를 기억한다. 그리고 엄마의 죽음은 내 정신분석의 마침표가 되었다.

-108p


갇힌 신세가 편치는 않을 텐데, 아마 그래서 성질이 나쁜지도 몰랐다. 그럼 우리 엄마는, 엄마도 갇혀 있는 걸까? -182p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떤 이미지들을 숨기는 건 그것들을 내보였다가 더 큰 상처를 받을지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이며, 그럼에도 오히려 상처를 드러내고 완전히 씻어내야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을. -218p


​나는 천사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이었던 한 사람을 차차 알게 되었다. 내 오만함, 독립적이고 단호한 성향, 자기중심주의에 익숙해질 시간이 있었다.

-315p


​말! 병이 가장 심각했을 때 나는 말에 부딪혔고, 거의 회복된 지금은 말을 되찾았다. -353p


​왜 그랬을까? 내가 태어나고 미쳐버리게 된 그 사회에서 내가 맡을 역할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389p

 


<말하기 위한 말>의 업적만으로도 마리 카르디날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정신분석에 대해 선입견이 있다면 (그런데 우리 모두 다 조금씩 아프지 않나?) 반드시 읽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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