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중심 주제와 꾸준함이 전부다
발레리나를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한 드가의 작품은 내가 방문한 거의 모든 대형 미술관에서 볼 수 있었다. 관람 당시에는 알아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였기에 반가움이 앞섰지만 지나고 보니 그의 작품 역시 당연하게도, 발레리나가 아닌 소재를 다루기도 했다.
다작한 작가들의 경우 모든 작품을 다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생을 두고 가능한 많은 작품을 보기 위해 계속해서 주목할 작가일지는 모르겠다. 이름과 작풍이 매치가 안되는 작가들도 있고, 이름 또는 작풍 중에서 한쪽을 전혀 몰랐던 작가들도 있다. 그냥 마음에 드는 작품을 좀더 알아보는 공부가 유익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와 닿는(touching) 작품에는 사연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사연을 수집하다보면 어쨌든 세계가 조금씩 확장될 수 밖에 없다.
드가의 대표작 20여개를 살펴보니, 그 중에는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시카고 미술관의 작품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 한편 지나쳐왔으나 기록이 없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도 있고, 온라인에서만 볼 수 있던 유럽 미술관 소장작도 있다.
미국드라마 <화이트칼라>에서는 고야, 라파엘, 드가 등이 등장하고 존 싱어 사전트의 경우 이름보다는 그림(모작)으로 등장한다. 특히 라파엘과 드가의 경우 여러 시즌에 걸쳐 복선으로 등장한다. <화이트 칼라>에는 문학 작가들도 많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는 예술가들의 퍼레이드가 이루어지는 FBI 공조 수사물이라 스릴러 덕후이자 미술 덕후인 관객의 입장에서 포만감이 가득하다.
이번 게시물을 위해 드가의 명작들을 가볍게나마 살펴보면서, 창작활동을 하는 (넓은 범위의)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 생각해보게 됐다. 예술가에게는 시그니처가 필요한가?
필요하다. 드가, 모네는 물론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존 싱어 사전트나 에드워드 호퍼의 공통점은 시그니처가 확고한 작가라는 것이다.
이 시그니처라는 것은 일관된 소재 또는 주제와 화풍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관성이라는 것을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알아채려면 우선 다작을 해야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다작을 하다보니 어떤 일관성이 필연적으로 따라온 것일수도 있고 일관성을 가지고 표현할 수 밖에 없던 무언가가 다작의 원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덕분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저 이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그 장면에 감동을 받아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고흐는 책으로 배웠고, 모네는 병원에 걸린 그림을 대기시간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친근감을 갖게된 작가이다.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모여 그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또 다른 미술관에 도착해서 그 작가들을 알아보는 기쁨을 주었다.
이들이 대가로 인정받게 된 이유도 같을 것이다. 자기만의 시그니처,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일관성있는 다작. 어떤 예술가는 오래 살지 못하지만 많은 작품을 남겨 역사속에 박제된다. 그리고 오래 살아남아 왕성하게 활동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억된다.
요절한 천재라고해서, 다작이라는 노력을 스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때는 나이든 천재는 천재가 아니다, 라는 명제에 과몰입해서 천재가 아님을 인정하기 위해 애썼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성장과정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천재는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천재가 아니라면 더더욱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노력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노역이 연상되어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개념으로는 그 애씀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노력을 하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노력이라는 개념은 탐탁치 않고 노오력은 더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난 천재가 아니니까. 아니, 천재일지도 모르니까. 노력을 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