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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Sep 04. 2024

우산을 펴지 않고 지나보낸 소나기

집에 가기 싫은 날 1

​비가 오고 나서 더위는 한풀 꺾였다. 그날은 아직 걷고 싶은 날씨가 아니라 냉큼 버스를 탔다. 어느 토요일에도 우산 없이 걷다가 비를 맞으며 뛰었고, 다른 토요일에는 아예 비 생각을 못해서 비 맞을 각오를 하고 귀가한 적도 있다. 날씨와 상관 없이 책은 방수가방에 넣어 이중으로 보호하고, 앞뒤로 비소식이 있을 때는 우산도 챙겼다. 자리를 잡은 직후 소나기가 내렸고 해가 지는 동안 비가 왔다가 해가 떴다가 다시 비가 오는 중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바라보며 변덕스러운 신과 변덕스러운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타이핑할 생각이 떠오르면 날씨를 관찰하면서도 타이핑은 할 수 있다. 내 키보드에는 한글 자모음 표기가 없다. 자판을 보고 있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화면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글씨로 바뀌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 동시에 늘어나는 글자수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렇게 그 장면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실시간으로 오타를 잡아내는 정도에 작은 만족감을 느낄 뿐이다.




집에 가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최대한의 목표와 최소한의 목표 사이에서 자리를 옮겨야 할 때도 있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일단 두 시간 동안 천천히 두 번째 커피를 마시면서 한 호흡으로 타이핑을 했고 쉬는 시간에 빵을 주문했고 화장실에 다녀와서 빵을 먹었다. 비는 오락가락하지만 밤은 아직 멀었다. 전날 마른안주를 충동구매했는데 술상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첫 번째 커피와 함께 얇은 책 한 권을 읽고 실컷 놀다가 밥을 먹고 후식으로 마른 안주에 와인 한 잔을 하고 또 실컷 놀았는데도 오후 2시를 넘기지 못했다.


약간의 심리전은 있었다. 나가야 하는데 나가기 귀찮고, 사실 씻기 귀찮고, 뭐 그런. 빨래도 해야 하는데 빨래하다가 나가지 못할까봐 참았다. 어차피 씻을 거면서 최대한 늦게 씻으려고 꼼수를 부린 걸까. 대체 왜 그런걸까. 그러다 카페에 왔는데, 도착하자마자 비가 오는 걸 보고 그래서 그런걸까,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뚫고 나가기 위해 큰 결심을 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우산을 들고 나와야 한다. 비를 예상하지 못했어도 실제로 비가 왔던 날에는 나오려다 못나오거나 오늘처럼 나오는데 오랜 버퍼링이 걸린다. 힘들게 나왔기에 돌아가는 길도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곳에 갈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산이 없었다면 비가 그친 틈을 타서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을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 순간의 해방감을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스무 살 이전에는 집에 가족들이 있었으니 가능한 집에 늦게 가려고 했고, 스무 살 이후에는 집에 아무도 없었으니 가능한 집에 늦게 가려고 했다. 집에 꿀단지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집에 빨리 가고 싶어하기 시작한 건 이미 쉬는 재미가 노는 재미를 초월한, 서른 무렵이었다. 집에 늦게 가려고 가능한 모든 길을 돌아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느라 많이 걸었거나 사람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거나 대화 상대가 있으면 어딘가에서 끝없이 수다를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다 옛날 얘기다.


지금은 이런 날이 있을 뿐이다. 집에서 읽고 쓰는 데 약간 한계가 와서(약간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기분전환도 할 겸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한 뒤(주로 산책, 최근에는 버스) 자리를 잡고 작업을 했는데, 최대한의 미션을 수행해야 여기까지 나온 보람이 있고(꼭 해야할 일은 이미 끝났다.) 무엇보다도 이 시점에서 집에 가면 그냥 자거나 자다 깨서 밥 먹고 다시 자거나 멍 때리다가 밥 먹고 자거나 최악의 경우 불도 안 끄고 잘 것이 뻔하다.


밤은 아직도 소식이 없다. 그냥 실시간으로 실내가 환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집에 가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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