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보다 카페 2
우연과 우연을 다루는 마음가짐 혹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작은 탈선이 뜻밖의 행운으로 바뀌기도 한다. 멘붕과 지옥을 오가는 냉온탕이었던 몇번의 여행을 겪고 나서, 어느 정도는 마음을 비우게 됐다. 종종거려봐야 제 시간에 출발하지 못하는 (또는 오히려 일찍 떠나버리는) 버스가 있다고 해도 결국 나는 가야할 곳에 갈 것이다. 비행기를 놓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경유편이 직항으로 바뀐다면 모를까. 그게 마냥 운일까. 혹은 그 운을 믿음으로써 더욱 커지는 에너지일까.
적응하고 있는 외출의 방향과 반대로 올라왔다. 더웠고, 여태 문제였던 장비들이 진짜 문제를 일으켜 한동안 집안에서 작업하다가 마침내 방탈출의 날이 왔고, 발상을 전환했다. 원래는 심야에만 고려대상이었던 북부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토요일 오전이(었)다. 바로 어제 나름 장거리를 다녀왔기 때문에 당분간 멀리 나갈 생각이 없으므로 집앞보다 각성되나, 멀지 않은 근처 대학가로 나왔다. 이 정도는 걸어와야 한다는 고정관념때문에 자주 오지 못했는데 버스를 이용하면서 경로가 단순해졌다.
고작 옆 마을로의 이동이 무슨 여행 경로마냥 심각하다. 그럴 수 밖에. 책 세권에 키보드까지 챙겨서 여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곳을 새로 찾아내서 적응하려면 가깝다 해도 잘 모르는 동네를 무작정 찾아갈 수 없다. 그러다 자주 실패했고 매번 거의 같은 곳에 갔다. 그리고 오늘은 버스를 잘못 내렸다. 원래 내릴 곳을 놓쳐서 다음 정류소에 내렸다. 덕분에 버스에서 미리보기했던 학교 앞 카페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카페를 찾았다. 지나가는 길에, 그러니까 원래 가려던 곳으로 다시 내려가는 방향인데 아직 안전지대에 이르지 못한 낯선 지역에서 첫인상부터 훅 들어오는 적당히 고풍스러운 장소를 발견했다.
카페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몇가지 핵심 중 하나는 테라스의 유무다. 테라스가 있되, 형식적인 테라스나 흡연구역이 아닌 파리풍 테라스라면 일단 입장하고 보자. 내부가 더 좋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의 카페는 방금 전까지 전혀 그 존재를 몰랐지만 그와 같은 테라스에 로스터리까지 있어서 영업중이라는 팻말을 보자마자 바로 입장했다. 뷰라고 할 것도 없는 대로변에, 주택가를 향한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뒷문으로는 강한 햇살이 비치고 있지만 남쪽에 온실이 있다. 옆 건물의 생김새는 알 수 없되 천창이 있는 작은 온실 안에 나무와 화분들이 있고 내가 앉아있는 카페의 중앙 좌석에서 통창으로 온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좌우 두 테이블과 온실 앞의 두 테이블은 아직 비어있다.
온실과 후문 사이의 코너에는 바닥이 살짝 높아지는 단체석, 그래봐야 4인석이 있는데 이 테이블도 아직은 비어있다. 차지할 수 없는 자리지만 괜찮다. 단체 손님이 오기 전까지 이 고요함과 재즈와 식물을 독점할 수 있으니. 고요하지만 음악이 흐르고, 매장 전체의 유일한 객은 아니(었)고 온실 통창, 실제로는 벽을 보고 있기 때문에 정중앙에 앉아 있어도 시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편안함이 있다. (심지어 뒤통수 쪽에도 식물 선반이 있어서 막힌 파티션보다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유리벽보다는 사생활 보호가 되고 있다!) 첫인상보다 훨씬 정교한 인테리어로 실제보다 공간을 넓게 활용하면서도 넓은 공간 특유의 노출은 거의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집, 사무실, 선택의 폭이 좁은 심야카페를 포함하는 프랜차이저 카페를 벗어난 작업 공간은 그 자체로 기분 전환이 되지만 너무 예상을 벗어나면 역효과가 난다. 인테리어가 근사해서 ‘제품 촬영을 금지’해야만 하는 카페에서는 독서하다 책 사진을 찍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 원래 2층 이상의 카페는 그런 부담이 없어서 단골이 되는데, 그집은 오래 벼르다 딱 한 번 방문하고 발을 끊었다. 너무 난색인 조명도 결국 쿨톤 컬러와 맞지 않아서 변수가 되었다. 식물을 활용한 파티션, 피크타임이 아니기에 적당한 여백이 있는 단층카페는 그런 단점을 단숨에 극복한다. 뒤에는 음악, 앞에는 식물이 있을 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