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Sep 11. 2024

집에 가기 싫은 이유

집에 가기 싫은 날 2

​현실도피에 현실도피를 거듭했던 여름을 보내고 현실감각을 깨우기 위해 다른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햇반을 쟁여놓고 설거지를 하는 대신 방탈출을 해버리거나 결국 못 끊은 배달 어플의 프리미엄 회원 가입절차를 거쳐 부수적이고 사실 좀 쓸데없는 고민을 저 멀리 치워버린다거나. 이제 와 생각해보면 배달비 몇 천원을 비교하면서 날린 시간이 참 아깝지만 그땐 이 고민을 해결할 수단이 별로 없었다. 메뉴를 결정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날도 있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유독 절망적인 날도 있었다.


이 두려움이 은근하지만 상당한 압박인 날이었다. 이전에 직진하다 등산해버렸던 그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이전 정류장에 내렸는데 마음에 드는 혹은 환대 받는 느낌이 드는 카페가 없어서 그 한 정류장을 내내 걸어왔다. 여기까지 오면 일단 단골 서점이 있다. 오는 길에 이름만 들어본 잘 모르는 서점이 있었는데 통창 너머로 안에 계시는 관계자님과 눈이 마주쳐서 그냥 도망쳤다. 서점 자석이 서점에 끌려가는 것이 안에서도 보이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목적지는 서점보다 카페, 하지만 이것저것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 가장 무난한 곳을 마지못해 선택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어쩐 일인지,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창가석의 학생(혹은 나처럼 혼자 뭘 쓰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온라인 콘텐츠 생산을 (더 많이, 더 잘) 하기 위해 3년 정도 갓생을 살고 있다. 크고 작은 싫어증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난동을 피운다. 무기력한 현실을 피해 산책을 했고, 더위를 호되게 먹었고, 아플 때는 왠지 오기가 발동해서 서평을 쓰다가 살짝 번아웃(그러니까, 큰 번아웃이 품은 작은 번아웃)이 왔고 갑자기 게임을 하다가 오늘내일하던 휴대폰이 고장나고 그로부터 2주 정도 휴대폰이 있지만 없는 상태를 핑계삼아 책을 좀 읽긴 했다. 그동안 달래가며 사용한 장비들에 비하면 너무 사랑스러운(?) 폰으로 당장 도피해들어가진 않았다. 일련의 사건들이 정리되자마자 멘탈이 굴을 파고 숨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 불규칙적인 도파민 분비는 불면증을 악화시켰다.

 

이번에는 맞불을 놓고 버닝을 했는데 중간 크기의 번아웃이라고 해야하나? 갑자기 시간이 헷갈린다. 그게 벌써 3주 전이었다. 연재중인 소설과 에세이의 초고를 같은 날 연달아서 썼는데(소설은 연재 당일, 에세이는 인스타그램에 선발행이지만 곧 선후관계 의미가 없어질 예정) 그 목요일부터 다음 연재일인 월요일까지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잠만 잤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느낌을 위해 과장하자면 그렇다. 아이러니한 건 잠만 자도 하루에 한 개 정도의 (미리 써둔) 서평을 발행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그게 수시로 발행 버튼을 누를 때는 가능하다. 한편 마침 이때 휴가였던 포토덤프챌린지는 아주 신나게 스킵했다. 하지만 연재를 더 잘하려면 딴짓의 기능을 해주는 블로그와 스레드가 도움이 된다.




랜덤으로 찾아오는 의욕 넘치는 기간에는 덕질과 무관해진 다른 일을 하다가 덕질할 생각에 행복한 귀가를 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집에 가기 싫은 이유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예전에는 더 놀고 싶어서, 그러니까 친구 혹은 불특정 다수와 더 있고 싶어서 집에 가기 싫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음 맞는 친구라면 헤어지기 아쉽더라도 그 친구가 한가하지 않고 (어쩌면 내가 ‘바쁜’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고) 불특정 다수와의 행사는 좋지도 싫지도 않다.


팬데믹 끝물에는 없던 대인울렁증까지 생길 정도로 2020년대는 사람을 망쳐놨다. 그렇다고 네버엔딩 댄스파티 시절에 내가 낯을 가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마트와 ​쇼핑몰, 특히 서점, 도서전, 관련 행사로 다이빙하는 건 매우 즐거운데 집에서 하는 온라인 쇼핑이나 콘텐츠 시청만큼 편안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써야 할 분량만 쓰고 다른 볼일을 보거나 산책을 할 수 있는 이 상황(외근)이 상쾌하다.


집에 가면 무제한으로 쉴 수도 있겠지만, 너무 아무 것도 못하겠는 컨디션이 아니라면 무제한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셀프압박한다. 놀고 싶어서-함께보다 다시 일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일하고 당당하게 기분전환 하고 싶어서-혼자, 아직은 집에 가기 싫다.



(계속)





이전 10화 우산을 펴지 않고 지나보낸 소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