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다시 봄이 오겠지>
록시는 3월부터 회사에 안 나올 거라고 나에게만 얘기했다. 이건 혜미에게도 말하지 말고, 아직 회사에도 통보하지 않았으니 모른 척해달라며. 록시와 회사에서도 담소를 나누는 것은 즐겁지만 어쩐지 공사가 얽히는 느낌이 없지 않았기에 서운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대부분의 불안정한 관계가 그랬다. 계속할지, 그만둘지 자기도 모르게 고민하게 되는 그런 관계들. 상대방이 끊어주면 부정과 분노를 거쳐 체념하게 되지만 그런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아도 되기에 날아갈 듯 개운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록시는 최고의 동료사원은 아니었다. 그녀가 동료로 나쁘거나 사원으로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너무 많이 친해진 것일 뿐. 최고의 동료사원은 회사에서만 볼 수 있는 반면, 회사 밖에서는 절대 볼 수 없고(이건 단점 같지만 장기적으로 장점이다.) 서로를 향한 에너지를 회사 안에 집중시키는 관계다. 아직은 우리 모두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빈틈이 없으면 회사 밖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입장에서는 혜미로 인해 사적 관계로 발전한 록시가, 유일한 경우였다.
휴학생인 록시는 중소기업 입사 2년 차인 오빠와 오빠의 모교 근처에 살고 있었다. 록시의 오빠는 나보다 한 살 많았는데 사진을 보면 벌써 사회생활에 찌들기 시작한 것 같다. 어쩌면 사진이 안 받는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언니 탕수육 좋아해?"
"아침부터 탕수육? 완전 좋지."
"우리 동네에 탕수육 맛집이 있는데, 혼자서 다 못 먹으니까 누가 놀러 오면 세트로 시키거든."
"오빠랑 겸상 안 하냐?"
"오빠는 돼지고기 못 먹어. 시켜봐야 삼선짬뽕이야."
"그렇구나. 혜미 좀 깨워봐."
혜미는 록시의 모든 질문에 신음이 섞인 애매한 답변만 반복했다. 록시는 세 번쯤 물어보다가 주문을 먼저 하고 다시 혜미를 깨우러 들어갔다. 이번에는 나도 함께 들어갔다. 내 목소리가 더 자극적일 것 같았다.
"혜미야. 너 짜장이야, 짬뽕이야?"
"짬뽕."
"이야, 혜미가 언니 질문에는 단어로 대답하네?"
"혜미야. 일어나서 물 한잔 해."
"물."
"얼른, 일어나, 인나봐."
혜미를 안아서 일으켜 세웠더니 언제 잠꼬대를 했냐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방에서 나가면 주방이긴 한데, 혜미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건가?
"나만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우리 다 비슷할걸. 나는 내 집이니까 눈뜨자마자 알아차린 거고. 혜미는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겠지."
그때 혜미가 조용히 들어와서 속삭였다.
"록시언니, 왜 컵이 이거밖에 없어?"
"야, 그거 술잔이잖아."
"어, 우리 집에 머그컵 두 개 빼고 다 술잔인데 한 개는 내가 오빠방에 갖다 놨고 다른 한 개는 포뇨언니가 커피 마셨잖아."
"그럼 난 그냥 와인잔에 물 마신다?"
"응. 거기다 마셔."
혜미는 다 알고 있었다. 잠을 좀 더 푹 잤을 뿐, 잠들기 전까지의 기억이 상실된 구간은 거의 없다고 했다. 별일이 없다는 말에 퍼즐 맞추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들어도 내 기억이 아니고, 듣고 기억해도 언젠가는 또 잊을 텐데.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한 개씩 먹었는지 두 개씩 먹었는지 알게 뭐람.
"언니들 내일 출근하지?"
배달 온 음식을 차리면서 혜미가 물었다. 록시는 수요일까지만 나올 예정이었다. 인수인계가 필요한 위치가 아니어서 회사에는 내일 얘기한다고 했다. 어차피 2개월 계약은 지난주에 끝났고, 추가 계약에 대한 언급도 없이 일단 나오라는 말에 나오고 있던 중이었다.
"출근하기 싫어서 고민 중이야. 월차 쓸까?"
"어,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안 쓰면 이번 달에 못 쓸지도 모르겠는데?"
록시 덕분에 날릴 뻔한 월차를 되찾을 기회가 생겼다. 팀장이 다른 건 몰라도 월차는 꼭 챙겨주는 사람이라, 마지막날까지 월차를 쓰지 못한 사람에게는 당일 아침에라도 전화로 알려주거나 출근 즉시 퇴근시켜 버린다. 생각난 김에 팀장에게 문자라도 하려고 휴대폰을 찾아 열어보니 텔레파시가 통한 듯, 문자가 와 있었다.
-내일 월차입니다. 쉬세요.
그나마 이런 회사라서, 나라도 다닐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