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그 소원이 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206p
불길이 번졌던 자리에 앉아 있구나, 나는 생각한다.
들보가 무너지고 재가 솟구치던 자리에 앉아 있다.
-244p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p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 한국어로 읽고 쓰는 사람들에게 마침내 도달한 경사가 과연 경사인지 다시 묻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놀러가다, 놀다가 참사를 겪은 사람들을 진혼하기 위해 놀러가고 노는 행위를 참(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인간 생활이다. 단지 삶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살아서 웃는 것을 욕할 수 없다. 정작 욕하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할 부류일 가능성이 높다.
절멸을 피해 살아남은 형제자매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거라 막연하게 짐작한다. 소설 속 경하의 망설임은 이 소설을 쓰고 읽을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다.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 멈출 수 없다.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벗어나도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다. 부모가 겪은 상실의 유산은 인선의 상실을 통해 경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퇴로가 끊어진 고립설산.
독자들은 그곳으로 소환되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고통으로 초대하는 마음은 고통스럽다. 위궤양은 상징일 뿐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소설의 작가가 마음을 헐어서 길을 냈다는 것은 알겠다. 그 길에 들어서는 발걸음은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내가 상처받은 나의 위장을 밟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나가기 위해서, 이 길이 끝날 때까지 아픈 곳을 밟아야 한다. 경하와 인선이 그랬듯. 저 눈에 파묻히기까지 깊은 고립과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빛에 의지해야 한다.
모르고 살지 말라고 하고 싶다.
모른 척 하지 말라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알려진 것의 일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마음을 헐어서, 듣는 사람은 무거운 자료집을 보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내가 인선의 가족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그 순간 생각해버렸다. 내 손으로 삼 분에 한 번씩 저 바늘들을 그녀의 손가락에 찌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43p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99p
혼자만 산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 불꽃 같은 게 활활 가슴에 일어서 얼어죽지 않은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그때 젖은 신발이 끝까지 마르지 않아 발가락 네 개가 떨어져나갔는데, 나중에야 그걸 알았지만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더래요.
-133p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281p
이제 돌아가야겠어, 하고 인선이 뒤이어 중얼거렸을 때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은가. 돌아갈 곳이 있나. -309p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314p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뒤표지(신형철)
조심스러웠던 적이 있다. 아직 트라우마에 깔려있는 사람이 더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 날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겪고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어지간한 일에 놀라지 않는다. 사랑을 가슴에 묻었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누군가의 살지 못한 날까지 살아가고,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