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레베카 스톤> 15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전편에서 이어짐)



마야는 이부자매인 미나에게 특별한 재능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에게는 전혀 발현되지 않았기에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미나 또한 미나 자신과 달리 유전자나 가정 환경에 대해 별다른 집착이 없는 마야에게 별 기대가 없었다. 다만 베키만큼은 애지중지했다. 모계 혈연이 중요한만큼 친동생인 지우보다 조카인 베키가 신경쓰였다.


마야는 세계 각지의 풍습에 매력을 느끼는데 한국인들이 미신에 집착하는 모습은 매번 놀라웠다. 파리에 사는 미나가 집안 구석구석 부적을 숨겨둔 사실을 알면 옆집 메러디스는 어떻게 생각할까?


-베키가 나처럼 될 거 같아


줄리앙의 실종으로 마르셀의 집에 비상이 걸려서 육아시간이 대폭 늘어난 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미나의 폭탄선언이었다. 내 딸이 미나처럼 된다고? 미나와 마찬가지로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상당 시간을 보낸 마야는 부두교 영매 맘보나 로마니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내 딸이 그럴거라고? 앤이 향수에 시달렸고 마야 자신은 역마살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그런 집안 내력 때문인가.


베키는 이미 독립적인데다 조르주의 동행 하에 폴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번 실종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이건 그들의 세계에는 문외한인 마야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마야 역시 지리학자에 가까운 포지션이긴 했으나 파리에 살고 있는 미나의 지인들에게는 외부인이었다. 그보다는 무신론자 미국인이었다. 이들은 베키에게 훨씬 더 친밀감을 느껴왔다는 걸 마야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번주는 아이들에게 집중해야겠어요. 미리 써둔 예비 원고를 저녁때 보내드릴게요.


마야는 남은 여행 기간에 배리와 벤을 전담할 각오를 하고 휴업을 결심을 했다. 송고하기 미흡했던 몇 개의 원고를 마저 손질해서 보내면서 편집자에게 구체적인 휴무 일정을 알릴 것이다.




마르셀은 줄리앙의 화난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줄리앙의 부재로 새파랗게 질려있는 헨리크를 보고 있으니 딴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제이미는 기본적으로 자기 관심사 외에는 무심해서 평소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이 일에 빠질 수는 없지만 제이미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마르셀과 헨리크가 줄리앙의 방에서 없어진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동안 제이미는 줄리앙의 어린 시절 앨범에 푹 빠져 있었다. 메러디스가 그런 제이미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마르셀 선생이랑 줄리앙 학교에 가봐.”

“할머니는 어디 가실건데요?”

“헨리크 데리고 줄리앙이 자주 처박힌다는 극장에 가보려고. 베키랑 폴이 미술관에 갈 거야.”


누군가가 수사 본부를 지휘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마르셀과 상의한 조 편성을 메러디스가 아이들에게 조용히 전달했다. 그녀는 베키와 폴을 데리고 미술관에 가라고 조르주에게 전화했고, 제이미를 마르셀에게 남긴 후 헨리크와 함께 집을 나설 것이다.


“헨리크 오라고 해. 넌 마르셀 선생을 따라가고.”


제이미는 마르셀에게 묘한 거리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할머니와 하루종일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군말없이 돌아가서 헨리크에게 말했다.


“주방으로 가봐. 메러디스 할머니가 보자고 하셔.”




베키는 홀가분하면서도 서운했다. 엄마가 알아서 할테니 동생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마야의 얼굴이 어쩐지 걱정스러웠다. 그건 베키 자신을 걱정하는 엄마의 얼굴이었다. 동생들까지 걱정할 정신은 없었지만 괜시리 마음이 먹먹했다. 동생들이 베키를 찾아도 이제는 엄마가 해결할게. 엄마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폴과 베키를 차에 태우고 강을 건너 달리던 조르주가 속도를 줄이더니 좌회전을 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이었다. 마르셀이 학교를 수색하는 동안 메러디스는 극장을 수색했고, 조르주에게도 아이들과 함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줄리앙이 있는지 찾아보라는 연락이 왔다. 조르주는 평소에도 폴과 베키를 데리고 다녔지만 오늘 아침에 갑자기 수업이 취소되어 폴을 다시 집에 내려주고 출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나의 언니라고는 하지만 베키를 데려다줄때 인사만 하고 스몰토크조차 하지 않았던 마야에게 폴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참 어색했다. 베키는 여행을 온 것이고 파리에 살고 있는 폴의 집에 베키가 와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르네에게 베키를 맡기기는 불안했던 것이다.


일단 폴을 베키에게 데려다주자는 다소 황당한 제안에도 르네는 동요하지 않았다. 베키가 폴에 집에 놀러오기도 했으니 이상할 건 없다. 폴이 베키의 집에 놀러가면 르네 자신이 평소의 루틴을 지킬 수 있었다. 베키를 만난 이후, 엄마를 향한 애정을 잊은 듯한 폴을 보면서 르네는 서운하기보단 홀가분했다. 르네가 베키를 만나면, 조르주처럼 르네도 미나를 떠올리겠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삼촌은 여기 와보신 적 있겠죠?”

“응. 안 그래도 베키에게 보여주려고 했었어.”


끝없이 펼쳐진 모네의 방을 지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을 때 베키는 갑작스러운 평화를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래가진 않았다. 폴은 조금 산만해졌지만 베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이번만큼은 조르주도 두 아이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지하의 전시실은 고요했고 세 사람은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줄리앙을 떠올리자 죄책감이 들었다.


“이제 2층으로 가볼까?”

“아빠, 우리 베르트 모리조에게 가야 해요.”


조르주와 폴이 거의 동시에 입을 뗐다. 베키는 두 사람을 부르는 그 화가를 잘 몰랐지만 그 이름을 듣자마자 한시바삐 그곳에 가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빨리 와.”


먼저 이동하기 시작한 베키가 폴을 부르며 발길을 재촉했다. 베키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의 키가 커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의 위치를 아는 폴이 앞질러서 베키를 이끌었고, 조르주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보고 기운을 되찾았다. 폴이 말한 전시실이 어디인지는 조르주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이곳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폴과 조르주는 집을 코앞에 두고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베키는 한껏 고양된 얼굴로 조르주를 돌아보았고, 조르주는 미나의 황홀한 표정이 떠올라 어지러웠다.


-어쩌면 이곳에 더 많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베키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얼굴을 읽은 조르주는 동요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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